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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당인가 자민당인가/전영기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과거사에 대한 일왕의 사과여부및 수준을 놓고 일본 조야와 언론이 「일왕사과불가」 입장을 각본에 짠듯 한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우리 집권여당인 민자당은 「가해자」보다 더 관대한 「아량과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일본 집권 자민당은 『노대통령 방일시 천황페하의 말씀문제에 신중을 기해야한다』며 아키히토(명인)왕이 「84년도 유감표명」 수준이상의 발언을 해선 안된다는 당론을 자기 정부측에 전달했다.
한술 더 떠 오자와(소택) 간사장은 『사죄,사죄하는데 땅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조아릴 수 없다』 『반성하고 있으니 경제협력하는 것』이라는 등의 감정적 발언을 뱉었다. 여기에 일본정부는 과거사문제 처리를 총리·외무성에 맡기기로 15일 결정함으로써 사과 주체가 일왕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했다.
당론,의원 개인발언,정부의 공식입장표명이 매끄럽게 연결된 느낌이다.
그러나 우리쪽 사정을 보자. 정부는 일왕의 직접사과요구를 관철키로 하고 여러가지 대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정작 민자당은 한마디 논평도 없다. 민자당수뇌부인 김영삼대표,김종필·박태준최고위원이 15일 오전 만났으나 『좋지 않은 고위층 발언이 나와 문제를 어렵게해 안타깝다. 양국간 감정이 나빠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는 매우 「격조높은 우려」만 주고받았을 뿐이다. 김대표는 방한중인 일본의원들의 말을 전하면서 『국민들의 천황제지지가 워낙 높아 정치인들도 천황얘기를 하기 어렵다더라』고 했는가 하면 박최고위원은 『일왕은 국정권한이 없는 상징적 존재인데 이때문에 감정싸움이 일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바로 일본측 논리를 그대로 되풀이했다.
김종필최고위원은 이 문제에 대해 민자당 당론이 없느냐는 질문에 『당론은 무슨 당론,정부에서 잘 알아서 할 것』이라고 짜증스럽게 얘기했다.
세 최고위원들의 생각이 이러니 민자당은 당론 수렴도,대변인 성명도 낼 리가 없다.
대변인실은 일왕의 헌법적 권리를 열심히 알아보더니 『이런일 갖고 무슨 논평이냐. 괜히 양국간 싸움만 부채질할 필요는 없다』고 일본측 입장을 다시 대변했다.
종종 민자당은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을 우리 정치의 모델로 얘기하곤 했다.
자민당에 대한 이런 아류의 정신이 민자당을 저토록 무위하게 만들었을까,아니면 양국간의 내밀한 관계를 잘 알고 있어서인가. 그렇더라도 일본 자민당은 자기네들 국민지지도 생각해 「망언」도 서슴지 않는데 한국의 민자당은 국민감정도 나몰라라 하고 있으니 이런 정치적 무감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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