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설원작『피아골』검열 〃홍역〃 55년 이강천 감독 작품····간판걸었다 버리기 세차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월례한국영화감상회라는 것이 작년 한햇 동안 정기적으로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있었다. 건전하고 성실한 영화들이 상영되고는 했다. 시사가 끝나면 감독·출연자들이 앞에 나와 앉아 관객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마련되었었다.
언젠가는 지리산 빨치산의 생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해 고전적 걸작으로 꼽히는 『피아골』 (감독 이강천·55년)이 상영되었었다.
뒷좌석 한구석에서는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안성기가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는 정지영 감독이 연출중인 이태원작 『남부군』에 출연중이었다. 『피아골』에 나오는 게릴라 대원들은 바로 원작자 자신일 수도 있었다. 안성기는 그때 자기가 하고 있는 연기를 35년 전의 배우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고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아골』의 각본은 그 당시 전북경찰국경위였던 김종환이 썼다. 김종환은 부산에 출장갔다가 지리산 빨치산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를 듣고 홍미를 느낀다. 그리고 빨치산들이 남긴 여러 종류의 수기·기록도 입수한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이강천 감독에게 얘기한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1948년께 『끊어진 항로』라는 16mm 전창근 영화의 미술을 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를 하게된 이강천(1920년생)은 1954년 16mm 『아리랑』 을 발표해 호평을 받고 있었다. 이강천과 김종환은 빨치산의 수기·자료 등을 한보따리 들고 변산해수욕장 근처 어느 여관에 틀어박혀 각본작업을 한다. 그리고는 지리산 현장답사를 하고 돌아온다.
지리산 근처 구례출신의 외화수입업자 김범기가 제작자가 된다. 당초『빨치산』으로 정하려던 타이틀이『피아골』이 된 것도 김범기의 아이디어였다.
촬영은 화엄사를 중심으로 폐허같은 암자를 전전하며 약 4개월간 진행된다. 말이 영화제작이지 그날 그날의 진행비조차 바닥이 나 밥과 물김치로 끼니를 때웠다. 김진규와 주연했던 노경희의 회상이다. 이강천 감독이 동대문시장에서 조달한 빨치산 복장을 하고 산속을 누비고 있노라면 지나가던 나무꾼이 『동무들 수고하시오』했다. 긴가민가 이상했겠지만 일단 그렇게 인사해야 무난할 것 같았던 모양이다.
『피아골』의 라스트신은 노경희가 총 맞은 김진규를 부축해 계곡을 빠져 나오는 장면인데, 앙리 조르주클루조의 『정부마농」의 라스트신에 필적하는 명장면이다. 그러나 이 때쯤엔필름이 바닥나 찌꺼기 조각의 토막필름을 넣어 천신만고 끝에 찍었다. 이 장면은 섬진강 모래사장에서 찍었다. 이때는 진행비가 없어 다른 스태프는 다 귀경하고 필요한 몇 사람만 남아있었다. 돌아올 때는 여비가 없어 노경회의 금목걸이를 시골장터에서 처분해 차표를 샀다.
노경희는 작년 대종상때 심사위원장을 지냈다. 『덩치가 크고 입술이 두껍다고 요샌 출연교섭이 없다구』는 그녀의 말이다. 그녀는 용모·체구가 서구적이다. 그후 신승수 감독의 『빨간 여배우』에 뚜쟁이 여두목으로 나왔는데 분위기가 좋다는 중론이었다.
『피아골』은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한 그 생태묘사와 인간연구라는 점에서 검열이 안나와 고생했다. 간판이 국도극장에 걸렸다가 내려지고, 단성사에 걸렸다가 내러지고, 수도극장에 걸렸다가 내려지고, 마침내 다시 국도극장에 걸렸다. 검열업무는 문교부에서 했는데, 장군을지낸 이선근 문교부장관이 내무부장관에게 얘기해서밀어 주었다.
국방부 정훈국장이었던 시인 김종문이 영화를 공격하고 나섰고 문학평론가 임긍재가 옹호하고 나서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육군본부 정훈부(부)감이었던 소설가 선우휘가 옹호론 쪽에서 거들었다. 그러나 『피아골』은 요란한 화제에 비해 흥행이 썩 잘된 편은 아니었다.
이강천 은『피아골』평가의 여세를 몰아 『백치아다다』『아름다운 악녀』『생명』등 대표작을 비롯한 28편을 발표하고 원로감독의 위치를 확보한다.
『피아골』은 유익겸의『오발탄』과 함께 대표적 한국영화 상위 그룹에 늘 랭크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