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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루빈의 부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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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1993년 1월 취임식 당일 대통령령 1호를 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개편 지시였다. 다음날 2호를 통해 NSC 상설 멤버를 늘렸다. 그 나흘 뒤 국가경제회의(NEC)를 만들었다. 대내외 경제 문제를 다루는 조직이다. 대선 때의 경제 안보 공약에 따른 조치다. 의장은 루빈 경제보좌관. 세계적 투자은행 골드먼삭스 공동 회장에서 발탁됐다.

NEC는 대외 정책에서 국무부와 마찰을 빚는다. 국무부의 대중(對中) 인권 외교에 맞서 통상 외교를 내세웠다. 89년 천안문 사태의 '과거'가 아닌 중국의 잠재력이라는 '미래'에 주목했다. 국무-경제 라인 갈등은 클린턴 행정부 초기의 특징이다. 월가 실력자 루빈의 등판을 빼놓을 수 없다.

95년 1월. 루빈은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루비노믹스(Rubinomics)가 시작됐다. 재정.무역의 쌍둥이 적자가 걷히면서 장기 호황의 막이 올랐다. 루빈은 경제 외교의 전면에도 섰다. 아시아 경제 위기가 불거지면서다. 미국은 중국에 바짝 다가갔고, 인권 외교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른바 미.중 전략적 동반자 시대. 미국에 중국은 역내 안정자요, 일본은 수동적 방관자였다(98년 '포린 어페어스', 후나바시). 미.중 새 관계를 상징한 것은 루빈-주룽지 부총리(98년 후 총리) 간 파이프. 핫라인을 텄다. '일본 없음'(Japan nothing), '대만 팔아치우기' 얘기가 돌 때다.

요즘 미.중 해빙 무드가 완연하다. 주역은 폴슨 재무장관. 루빈과 마찬가지로 골드먼삭스 회장을 접고 7월 임명됐다. 70여 차례 방중한 지중파(知中派)다. 그가 지난주 중국에 들러 양국 간 '경제전략 대화'에 합의했다. 카운터파트는 우이 부총리.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경제통이다. 폴슨은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20분간 독대도 했다. 후대(厚待)다. 폴슨은 중국에 위안화 평가절상을 압박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중국은 '책임 있는 이해 당사자(stakeholder)'라고 했다. 부시 행정부 초기의 '전략적 경쟁자 중국' 슬로건은 힘이 빠지는 분위기다.

폴슨의 방중은 시기도 묘하다. 그 직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동북아 구상을 들었다. 일본에선 아베 새 정권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다. 꼬일 대로 꼬인 동북아에 새 흐름이 생겨날 것 같다. 한.일 관계를 되돌리고 중.일 간에 다리를 놓는 적극적 발상이 필요한 시점이다. 외교의 묘미도 결국은 타이밍에 있지 않은가.

오영환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