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가 있는 국토기행(4)정약용 다산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사람을 산에 비유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의 크기와 높이를 비유할 산은 이 땅위에는 아직 없다. 대저 저 방대한 「다산학」을 누가 자로 잴 수 있으며 백성들의 삶을 낱낱이 그려낸 한 시대의 휼민시 (휼민시)의 깊이를 어떤 그릇으로 퍼 올릴 수 있다는 것인가. 그 불가사의한 대역사 현장은 어디인가.
옹기종기 작고 큰 섬들이 떠있는 다도해를 굽어보며 강진만을 에워싸고 솟아있는 만덕산 품안에 마치 젖 먹는 아이처럼 엎드려 있는 산이 있으니 그 이름이 다산이다.
유배의 몸인 정약용이 이 산에 온 것은 1808년 봄이었으니 때는 이맘때가 아닌가 싶고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강릉군도암면만덕리 귤동의 뒷산인 다산에는 그의 외척이 되는 윤앙 (단) 의 산정이 있었고 강진에 유배 온지 8년만에 정약용은 윤단의 배려로 이곳에 거처를 옮기게 되어 그때부터 다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민중시의 선구자>
다산은 이곳에 와서 동암과 서암을 수리하여 수천의 전적들을 쌓아두고 저술과 창작에 몰입하기 10년, 『경세유표』 『목민심서』등 대표적 주요 저서를 집필했을 뿐 아니라 다산학이라고 통칭되는 그의 학문적 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또한 다산은 이곳에서 그의 대표적 휼민시 『전간기사』 등 많은 시편들을 낳았으니 오늘에 와서 민중시라고 불리는 백성들의 진물나는 아픔을 이 땅에 맨 처음 시로 꽃피운 이가 바로 다산임도 똑똑히 알아둘 일이다.
다산학은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산지식을 모두 집성한 세계사상사에 다시없는 학문의 대백과다.
철학·문학·정치·경제·종교·예술·의학·농업·과학·천문·지리·건축·법률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그의 저술이 총5백9권에 이르고 있으니 한사람이 한 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여기서 다산이 누구인가를 더듬어 보자. 그는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아버지 정재원, 어머니 해남윤씨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손수 지은 묘지용에서 「아홉살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열살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5년 동안 벼슬을 안하시고 쉬고 계셨는데 그때 나는 경서와 사해·고문 등을 열심히 배웠으며 또한 시를 잘 짓는다는 칭찬을 들었다」 고 유년시절을 적고있다.
다산은 열다섯살에 결혼하고 아버지가 호조좌랑의 벼슬길에 으르자 서울로 올라오게 되는데 당대에 문명을 떨치던 이가환의 생질인 이승훈이 자형으로 그들은 성호 이익의 문하생들이었고 다산도 그 영향을 크게 입게 된다.
그는 여기서 두 갈래의 길을 걷게 되니 바로 성호의 실학사상에서 뒷날 다산실학이라는 큰산을 이룬 것이 그 하나요, 자형인 이승훈이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서 천주교의 교인으로 돌아오게 되어 다산이 서학 (천주교) 에 빠진 것이 그 둘이다.

<백성의 애환 노래>
다산은 정조 21년과 23년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이 천주교도가 아님을 소명하는 상소를 바쳐 화를 면했으나 정조가 승하한 다음해인 1801년 노론 벽파들이 남인들을 몰아내려고 일으킨 신유사옥을 만나 셋째형 고종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 당하고 둘째형 고령은 전라도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 (장기현)으로 유배당하는 일사이휼의 참화를 겪는다.
그해 10월 다시 다산의 큰형 고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북경의 주교에게 조선 교회의 참화를 글로 써보낸 「황사영백서」가 발견되어 고전과 다산은 다시 서울로 투옥되었다가 감형되어 형제가 유배길에 오르게되는데 나주의 율정점에서 하룻밤을 묵고 고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산은 강진읍내 주막거리 사선재에서 8년간 기거하며 『탐률악부』 『충절양』 『율정별』등 1백66편 3백72수의 시와『아학편』 등의 저술을 하다가 다산초당에 오게 된다. 그가 강진에 와서 쓴 시들은 하나같이 농촌과 어촌의 굶주리는 백성들의 애환, 살아가는 모습, 가엾음을 노래한 것인데 비록 한자로 쓰여졌지만 격식을 부수고 우리네 정서와 가락과 뜻을 살리면서 활달하고 자유롭게 시상을 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작품을 골라도 하나같이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처절하리만큼 극명하게 그려내고 있거니와 다산초당에 와서 의 흉년살이를 그린 『전간기사』6편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노래다. 그 중의『쑥뜯기(채고) 』의 1연을 옮겨 본다.
쑥을 뜯네 쑥을 뜯네
쑥 아닌 지칭개도 뜯네
양떼처럼 몰려다니며
저산 이 언덕
푸른 치마 허리 구부리고
붉은 머리 나붓기네
쑥을 뜯어 무얼 할거나
눈물만 하염없네
항아리엔 좁쌀 한 톨 없고
들엔 다른 푸성귀 없으니
다만 쑥으로 살아갈 밖에
뭉치지어 나눴다가
햇볕에 잘말려서
데치고 소금치고
진관 죽도 끓여 먹세
묽은 죽도 끓여 먹세
못사는 우리네 인생
이길밖에 또 무엇이 있으리.

<사회상 잘 드러나>
다산은 『전간기사』의 시작동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다산초당에 있을 때 큰 가물이 들었다. (중략) 유월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길을 메웠다. 마음 아파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살지 않는 것만 같지 못했다. 죄지은 몸이라 사람축에 낄 수도 없지만 오매 (구황의 물)를 구할 수도, 그들의 생활상을 그려 바칠 수도 없었다. (중략) 다만 쓰르라미나 귀뚜라미와 더불어 풀숲에 슬피 울뿐이다….』
다산은 총1천1백95편 2천2백86수라는 많은 시를 섰는데 그 중에는 경기도 암행어사 때의 관폐와 민생의 어려움 등 주로 백성들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하여 쓴 것도 있다. 그는 때로는 절규하고 때로는 품자하고 때로는 호령하며 민중의 가슴과 임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산 다운 것은 그가 「조선시」를 쓰리라고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남긴 작품 2천수>
나는 조선사람
조선시를 기쁘게 쓴다
그대는 그대의 법대로 쓰라
누가 나의 법을 탓하겠는가
구구하게 율격을 맞추는 일을
멀리사는 내가 어찌 알겠는가(아하조선인 감작조선시 경부용경법 우재의군수 구구격여율원인하득지).
중국에서 온 한시의 작법을 모를리 없는 다산이지만 그는 스스로 모르는 것으로 부정하고「조선시를 쓴다」 고 외치고 있다. 아아 남해의 큰물로도 다잴 수 없는 그의 생애와 학문, 그리고 시와 시론을 어찌 빙산 일 각인들 헤아릴 수 있으랴.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문학사도 다산으로부터 다시 쓰여져야 하고 우리의 문학이론도 다산으로부터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다산이 그렇듯 한자를 우리의 뜻으로 옮기는데 힘썼거늘 어찌 한글로 시를 쓰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숨가쁜 이 보릿고개의 봄날, 다산초당에 오른다. 그가 돌에 새긴 「정석」 두글자도 짚어보고 뒤켠 샘물도 떠마시며 추사집자가 걸린 동암·서암 돌아 그가 하염없이 이산조를 바라보고 울었다는 자리, 뒷날에 세워진 천일각 망루에서 다산의 마음을 그려본다.

<사진=임영주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