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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98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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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대구 유혈폭동… 미군정 후퇴/여운형 사노당 해체 앞서 김일성에 친필 편지
공산당의 기본전략은 미군정에 한번 본때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공산당측은 당수 박헌영과 민전 사무국장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 해제와 체포된 이주하의 즉시 석방,폐간조치한 조선인민보ㆍ현대일보ㆍ중앙신문 등의 복간,그리고 남조선 노동당 결성대회의 허가 등을 요구했다.
처음 9월29일까지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9월30일 밤부터 대구에서 돌발사건이 일어나 그만 피를 보게 되었다. 대구역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 철도노조원 및 기타 노동자들에게 난데없이 총알이 날아 들었다. 수명의 노동자가 비명을 올리며 피를 쏟았다. 대구의전병원에 수송 되었으나 그중 한사람이 죽고 말았다.
피를 본 노동자와 군중들은 흥분하여 순식간에 수만명의 데모대로 바뀌었다.
총를 발사한 것은 경찰이라하여 대구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는 별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점령당했다. 결국 무장경찰대가 대대적으로 출동하게 되어 대구시는 유혈의 거리로 변하고 말았다. 원래대구는 지식수준이 비교적 높은 곳이며 공산당 세력도 강한 고장중의 하나였다.
대구사건을 미군정측에서는 「10월폭동」이라 하고 공산당에서는 「10월인민항쟁」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 사건이 거의 끝났을 47년1월에 민전「10월사건」 조사단 사무국장으로 경북ㆍ경남지방을 다니며 조사를 했지만 그 살상의 참혹함은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공산당은 처음 계획했던 총파업이 유혈폭동으로 빗나가 조직에 큰 손실을 가져왔으나 처음 기대했던 소기의 목적은 그래도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미군정은 이 사건후 남조선 노동당 결성대회의 집회허가를 내주었다. 또 하나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공산당내의 소위 대회파,인민당내의 여운형파,남조선 신민당내의 백남운파가 김일성의 후원을 얻어 결성한 사회 노동당을 해체시켜 흡수한 것이었다.
10월의 유혈사건이 한창이던 10월16일 여운형은 박헌영의 남노당과는 별개의 사노당을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11월1일 예정대로 사노당을 결성했으나 여운형은 출석하지 않았다. 여운형이 사노당 결성에 소극적이 된 것은 미군정이 10월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남노당과 타협할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노당을 결성한지 11일만에 사노당을 해체할 것이니 남노당과 합당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노당은 당과 당의 합당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여운형이 11월12일 남노당에 사노당과 합당하자는 서한을 발송하기 이틀전 그가 평양의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이 있다.
이것은 편지라 하기 보다 어떻게 보면 하부가 상부에 보내는 보고서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사본은 47년7월19일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할때 자동차 안에 가지고 있던 가방안에서 나왔다.
이것을 당시 서울에 와있던 미국의 정치고문 조제프 제이컵스가 워싱턴의 국무장관에게 47년7월31일자로 보낸 것이 지금 워싱턴에 남아 있다.
분량이 많아 전부는 소개하지 못하나 부분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당시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국무장관 귀하. 47년7월25일자 전보 235에서 보고드린 서한,즉 47년7월19일에 암살당한 온건파 좌익 지도자인 여운형씨의 서류가방 속에서,발견된 서한을 동봉합니다.
여씨의 가방속에서 발견된 편지는 46년11월10일자의 것이며 여씨 자신의 친필로 된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같이 여씨는 온건파 좌익으로서 북조선 좌익지도자인 김일성과 김과봉 등과 통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여씨가 미국이 남조선을 점령한 날로부터 계속해 북조선의 이들 지도자들을 두번 방문했다는 것도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 공산당의 정보로서는 여운형이 평양을 세번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쪽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PN JAD
PD 19900430
PG 05
PQ 03
CP HS
SA P
CK 03
CS F01
BL 2021
GI 배명복
TI “프랑스 조계거주 한국인 2백명은 혁명가”
TX ◎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불 낭트서 발견 「새사료」 분석 공개/독립운동 공산계보 규명할 단서/웰치목사 친일밝혀져 논란일듯
상해임시정부시절 임정청사가 자리잡고 있던 프랑스조계에 거주하던 한국인 수는 모두 4백명으로 그중 절반인 2백명정도가 독립운동을 하는 혁명가로 파악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들 혁명가중 상당수가 공산주의에 경도,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받기도 한 것으로 최근 프랑스 낭트에서 발견된 일제하 한국관계자료 분석 결과 드러났다.
현재 파리에 머물고 있는 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은 29일 이들 자료에 대한 분석 결과를 파리주재 한국기자들에게 공개했다.
그중에는 1920년대 감리교 서울감독 웰치목사의 친일발언과 독립운동 세력내 공산주의 계보와 인맥을 나타내주는 내용을 비롯,상해거주 한국인을 둘러싼 프랑스와 일본간의 경찰권 시비,독립운동과 관련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일부 인물에 대한 활동기록 등 새로운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날 공개된 내용중 주목을 끌만한 몇가지 사항을 내용별로 간추려 정리해본다.
◇상해거주 한국인실태=상해주재 프랑스영사관이 본국 외무부에 보고한 자료(1925년7월21일자)에 따르면 당시 상해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는 프랑스조계내에 4백명,국제조계내에 2백명 등 모두 6백명. 상해임정 수립당시(1919년4월) 1천명이었으나 임정내 내분으로 중국내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로 빠져나간 사람이 점점 많아져 6백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프랑스조계거주 한국인의 성분은 4백명중 절반인 2백명이 혁명가로 분류돼 있고 ▲학생 1백50명 ▲전차차장 30명 ▲상인 10명 ▲교수ㆍ의사 20명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이번에 발견된 자료 가운데 최창식ㆍ윤자영ㆍ윤해ㆍ이동희ㆍ한형권ㆍ최용권ㆍ오성륜 등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들에 대한 활동기록이 다수 포함돼 있어 독립운동세력내의 공산주의 계보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당시 상해에 결성돼 있던 조선 공산주의 청년연맹에 대한 상세한 활동보고도 들어있다.
◇소련의 자금지원=1929년 12만달러라는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이 당시 소련 외교문제 담당관인 카라한으로부터 상해로 유입됐다는 새로운 기록이 발견됐다.
◇불ㆍ일간의 경찰권 문제=상해거주 한국인에 대한 경찰권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상해주재 프랑스영사관과 일본영사관이 때로는 협조하고,또 때로는 마찰을 빚기도 한것으로 드러났는데 한국인 문제와 관련,양측사이에 오고간 공문들이 이번 발굴자료중에 모두 포함돼 있다.
일본은 당시 월남을 식민지로 갖고 있던 프랑스에 대해 일본 및 중국내 일본관할지역에서 활동하다 붙잡힌 월남출신 독립운동가들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상해의 프랑스조계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체포를 의뢰하기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태규 사건=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건으로 1923년11월치 프랑스영사관 한국인 관계 문서중 상당부분이 이 사건에 관한 것이다.
한태규는 당시 상당히 거물급 독립투사였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밖에 해방후 김구선생의 공보비서를 지냈던 엄항섭에 대한 기록이 상당수 발견돼 지금까지 거의 조명이 안돼 있는 그의 상해임정시절 활동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운남광 무단활동과 관련,심웅이라는 전혀 새로운 인물이 자세히 소개돼 주목되고 있다.
◇웰치목사=지금 까지도 일제하 한국감리교 최고책임자로 추앙받고 있는 웰치목사(미국인)의 친일행적과 발언내용이 밝혀져 앞으로 우리나라교계에 적지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그가 당시(1924년3월)「파 이스턴 타임스」라는 영자지와의 회견에서 『한국은 일본의 지배로 안정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발언한 내용이 당시 신문기록과 함께 자료내용중에 포함돼 있다.
◇국민대표회의=1923년1월1일부터 6개월간 상해에서 국내외 61개단체 1백60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총집결,독립운동의 방향을 토론한 이 대회의 전모가 이번 자료에서 소상히 밝혀졌는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 회의가 지금까지는 피상적으로 밖에 알려져있지 않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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