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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형평감각/차하순(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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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근래 몇년 사이에 한국사회에서는 온갖 요구를 하는 세찬 목소리들이 들리고 있다. 민주주의사회라면 으레 그런 다양성이 허용되어야 하지 않는가하는 당연한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반민주적인 주장들이 서슴없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아래 나오고 있지 않는가하는 걱정도 없지않다. 그래서 우리는 새삼 민주주의적 사회원리에 관해 곰곰 생각해 보게 된다.
다양하고 상충된 요구들이 무리없이 수용되면서도 민주적 사회질서가 지켜질 수는 없겠는가. 이런 의문과 관련시켜 우리는 형평의 원칙을 거론할 수 있다.
○정치ㆍ경제적 의미 커
본래 형평(equity)은 법률개념이며 한때 일부 영미법 국가에서는 형평재판소가 설치된 적이 있었다. 아직도 형평은 법적 의미로 쓰이고 있으며,예컨대 법조문 뒤에 숨어있는 입법정신이라든가,형량선고에서의 법외적 고려를 언급하게 될 때는 형평원칙에 호소하게 된다.
구체적 예로서는 제5공화국 말기에 『사면ㆍ복권은 법의 형평에 입각해 처리되어야 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 경우 구속자들의 범법 경중과 자숙정도 등에 따라 정상을 참작해 가급적 관용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런에 최근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법적 형평보다도 차라리 정치적 의미의 형평으로 쏠리게 된다.
형평이 정치적 개념으로 쓰이게 된 것은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17세기의 고전적 민주주의 이론이 나오면서부터였고 특히 산업혁명을 겪은 후로 사상가들은 형평을 정치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형평은 정치철학에서뿐 아니라 경제분배론에서도 거론되었고 오늘날에는 사회철학적으로 가장 논의가 활발한 개념이 되었다.
요즈음 우리나라 신문보도에서도 자주 형평이라는 말이 오르내리고 정치인들이나 경제전문가들이 즐겨 쓰고 있는 실정이다. 조순 전부총리가 형평이론을 내세우다가 후퇴한 일로 인해 일반에까지 그 말이 더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신문과 일반인은 물론 전문가들까지도 형평을 다른 개념들과 혼동하고 있다. 여기서는 단지 세가지 점들을 들어 흔히 있는 혼동을 피하고 독자들의 정확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첫째로 지적될 것은 형평이 평등과 혼동되고 있다는 점이다. 평등으로 말하면 그것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은 일찍이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한 1인1표라는 선거권,즉 정치적 평등에서였다.
이 경우 평등이란 곧 「평준화」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법 앞의 평등은 무엇인가. 이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이며 한마디로 「무차별」을 뜻한다. 이에 대한 하나의 예는 5공말의 민통련 사건 공판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보도에 의하면 시위선동 및 소요혐의로 구속기소된 민통련 문익환의장은 『간부들이 모두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았기 때문에 형평의 원칙상 나에게도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어야 마땅하다고』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가 쓴 형평이란 말은 법의 「차별 없는」 적용을 의미하기 때문에 차라리 법적 평등을 거론했어야 옳았다고 생각된다.
○평등 공평 균형과 혼동
둘째로 형평은 흔히 공평과 혼동되고 있다. 『정의론』의 저자인 롤스(John Rawls)는 정의를 공평성의 관점에서 다룬 글에서 공평성의 두 요소로 ①규칙에 맞는 것 ②페어플레이정신 등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공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 자유로운 처지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조건에 따라 상호간에 협력 또는 경쟁의 관계에 있는 경우 서로가 서로에게 알맞고 올바른 예우를 해야 공평하다고 할수있다.
그리하여 이기고 지는 경기를 하게 된다든지,물건을 팔고 사는 거래행위에서와 같이 우리는 그러한 공동활동에서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며 이득과 부담을 나누게될 각자의 몫을 정함으로써 비로소 공평(또는 공정)하게 되었다고 할수 있다.
그렇게 될때 공동활동에 참여한 당사자들은 서로간에 상대방의 불법한 권리주장에 굴했다고 느끼지 않게 되고 또 이 느낌이야말로 공평성의 유지에 중요한 것이다.
셋째로 형평을 균형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각 지역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고려하지 않은 국토개발은 형평을 잃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이 예가 되겠다. 가령 최근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영남과 호남의 개발불균형,도시와 농촌간의 소득격차 등을 언급할때 흔히 그 준거로서 형평을 들먹이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형평은 평형이란 단어를 역순으로 한 것이긴 하나 평형이 뜻하는 균형과 혼동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다른 인접개념들과 형평이 동일시되거나 혼동되는 경우들을 살펴보았는데,그렇다면 형평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는 형평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간단치 않을 뿐더러 아직도 많은 논의를 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여기서는 상식적으로 말해 형평이란 일종의 정의이며 자유ㆍ평등ㆍ공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규정할 수 있겠다.
그리고 형평의 원칙은 두 차원에서 적용될 수 있다. 즉,형평은 개인과 개인사이에서 서로 주고 받는 사적행위에 대해서 뿐 아니라 공공의 사회정의에 대해서 적용되는 실천원칙이다.
○원칙확립이 시급하다
첫째,개인적 차원에서 우리는 형평의 기준을 『남이 나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는 성서적 격언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사회정의적 관점에서 형평은 우리 각자가 권리ㆍ책임ㆍ부담을 나누어 가짐에 있어서 능력ㆍ공과ㆍ필요에 따라 「각자에게 제몫을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형평원칙은 다양한 요구들이 절충되어야 하는 민주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점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이 각계 각층에서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형평원칙의 확립이 그 어느때보다 시급한 과제라 할수 있다.<역사학ㆍ서강대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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