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재계 헌금(정치와 돈: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대구 돈봉투 절반 재계 몫일듯”/격동기엔 “생존비용”… 실력자 면담에 3억설(주간연재)
『시류에 순응,살기 위해 돈을 냈다.』
일해청문회때 어느 재벌총수는 일해연구소에 50여억원의 성금을 낸 이유를 따져묻는 국회의원에게 시류론을 펼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시류론은 정경유착 의혹에 대한 재계 나름의 변명으로 들렸다.
재계에서는 시류론이 폭넓은 공감을 얻은 게 사실이다. 정치바람을 많이 타는 우리 현실로는 반대급부를 얻기 위해서는 압력에 의해 뜯기든간에 불가불 정치와 손잡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년 12월12일 증시부양책이 발표되기 이전에 증권협회가 50억원의 정치자금을 민정당에 헌납한 사실이 밝혀져 로비자금이 아니었느냐는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증권협회는 작년 4월께 민정당측으로부터 모증권사 사장을 통해 『증권회사가 돈을 많이 벌었으니 재정이 어려운 당에 정치헌금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증권회사의 한 관계자는 『처음 정치자금을 요구받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으나 10월에 두번째 독촉을 받은 뒤 「그게 아니구나」싶어 서둘러 회사별로 할당,돈을 거두게 됐다』고 밝혔다.
일해사건이나 증권업계의 정치헌금행위는 사실 정계와 재계 사이에 오간 「거래」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빙산의 물속에 잠긴 부분이 훨씬 큰 것처럼 많은 정치자금은 「잠수함」식으로 은밀하게 거래되고 그만큼 「뜯기는」유형도 다양하다.
모그룹 관계자는 87년말 대통령선거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독재정권 아래서는 최고권력자에게만 정치자금을 주면됐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소위 민주화의 봄이 오고 여러명의 후보가 대통령경선에 나서면서 상황이 복잡해졌지요. 모인사로부터는 「나중에 보자」는 노골적인 협박도 들어왔습니다.』
이 관계자는 다른 그룹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뒤 여소야대 국면에서는 여당과 야당에 대한 자금배분비율로 고민했다고 말했다.
대구서갑구 보궐선거의 돈봉투사건을 보는 재계의 눈은 더 착잡하다.
『1백억원ㆍ2백억원설이 떠돌지만 결국 뿌려진 돈의 태반은 재계가 부담했을 것』이라는 게 전경련 관계자의 시각이다.
대구서갑구 선거때는 서울에 있는 대기업이 모두 선거지원차 한번쯤은 사람을 내려보냈는데 모금할당설도 나돌고,선거부정조사에 연루될까봐 전전긍긍이라는 설도 있다.
재계의 정치헌금유형을 보면 대개 ▲경제단체나 정경간담회등을 통한 공개적인 기부 ▲협회의 헌금 ▲개인별 또는 건별 헌금 등으로 분류된다.
이중 액수도 크고 헌금행위 자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개별헌금이다. 헌금자체가 정경유착의혹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고 사실상 헌금의 대가로 반대급부가 돌아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헌금 액수가 많을때는 역시 정치적 격동기,권력중심의 변화때다.
5공초기 권력의 핵심을 만나는 「면담비용」이 3억원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있었다. 통합바람이 불던 때엔 권력핵심에 대한 「줄대기」가 곧 기업의 사활을 좌우했기 때문에 육사출신 잡기에 필사적이었다.
권력자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기업성장의 비결일 수 있고 밉보일 경우 한칼에 기업도산의 운명을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화국을 거칠 때마다 일어서는 기업이 있는가하면 무너지는 기업도 있었다. 국제그룹의 해체를 두고 아직도 말이 많은 것은 이같은 재계의 풍토를 반영한다.
재계가 정치권에 대는 뒷돈이나 정치헌금은 정치적 격동기에는 「생존비용」으로 탈바꿈한다.
준조세도 생존비용의 하나다.
준조세는 기업이 부담하는 조세 이외의 공과금과 기부성 공과금을 통틀어 가리킨다.
전경련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이 조사한바에 따르면 기업의 준조세부담률은 80년 매출액대비 0.48%에서 81년 0.55%,86년 0.82%,87년 0.74%등으로 해마다 높아져왔다.
이중 절반가량이 기부성 공과금임을 감안할때 10대 재벌그룹은 매년 수십억∼수백억원을 자발적 참여형식으로 돈을 뜯기고 있는 셈이다.
정치자금을 뜯기기는 사기업뿐만 아니라 공기업도 마찬가지다. 또 공기업과 국회의원 사이에 경제관료가 다리를 놓아주기도 한다. 국정감사때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경제부처의 한 국회담당공무원은 『골프부킹이야 기본적인 것이고 의원들의 외유때 비용보조,인사청탁 등을 수없이 받고 있다』고 실토했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주는 사례도 많다. 물론 반대급부가 있기 때문이고 격동기를 살아온 한국기업인들은 실력자 누구엔가에 돈을 주지 않으면 불안해하기도 한다.
한때 재계에서는 부실기업인수로 재미본 기업들이 있었다. 금융ㆍ세제상 특혜를 받아 돈 한푼 들이지 않고 기업확장을 했기 때문이다.
은퇴한 어느 재계원로는 5공때 모그룹에 자신이 수십년간 키워온 회사를 넘겨줬는데 정부로부터 수백억원의 정책자금을 융자받은 이 회사는 이중 상당액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재계와 정치권이 밀착해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보면 정치헌금의 강제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는지도 모른다.<길진현기자>PN JAD
PD 19900422
PG 03
PQ 03
CP HS
CK 04
CS F01
BL 1083
GO 분수대
TI 움직이는 문화(분수대)
TX 이어령 문화부장관은 비행기 얘기를 꺼냈다.
『여객기엔 세계 각처에서 별의 별 사람들이 다 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비행시간중에 우리나라 문화에 관한 체험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인상적이겠어요.』
그 다운 생각이다. 세상에선 그를 두고 「재치문답형 장관」이라고 빈정대는 말도 있지만,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기로 치면 그만한 장관도 드물 것이다. 그의 머리는 마치 물비늘처럼 언제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차있는 느낌이다.
사석에서 만난 이장관의 비행기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비행기의 기내식도 화제로 삼았다. 왜 프랑스식이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나라 음식 중에도 볼품있고 맛도 좋은 음식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잣죽도 좋고,전복죽도 좋고,오곡밥은 어떠냐고 했다. 후식으로 약밥이나 송편,인절미를 내놓아도 좋을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하는 말이 있다. 좋은 것의 표준은 무엇이든 외국것에서 찾는 습성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그냥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외국 같지』라고 말한다. 좋은 물건을 보고도 역시 마찬가지다. 일껏 좋게 말한다는 것이 『외국것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식이다.
이장관의 그 특유의 발상으로 요즘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것을 운영하고 있다. 공장들이 밀집한 공단,병원,사원,구민회관 등 국민의 살아있는 생활현장으로 찾아가 미술품을 전시하는 행사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지호,조방원,천경자,손일봉,최영림화백의 작품을 비롯해 목우회,후소회,한국 수채화협회,한국사진작가협회의 작품들도 출품되었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이 위주가 되어 있다.
작품의 손상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장관은 국민의 문화향수권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문화라면 괜히 어렵고,아니면 유별난 문화인들만의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국민공동의 것으로 아끼고,감상되고,상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와 빛나는 문화유산을 늘 자랑한다. 그러나 국민의 문화감각은 그런 자랑과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우선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와 애정에서 그것은 터득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부는 뒤늦게 그런 일을 할 모양인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