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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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두려운 것은 여기저기 흩어진 시체나 잘린 팔다리가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물든 채 승리에 도취된 자들의 광기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날 벌어진 광경은 같은 편인 기독교 주교가 보기에도 끔찍했다. 그날 십자군은 성 안에 남아 있던 거의 모든 무슬림과 유대인을 도륙했으며, 무릎 높이까지 흘러 넘치는 피로 성전(聖殿)을 씻어냈다. 십자군의 잔혹함은 흔히 무슬림의 관대함과 대조된다.

638년 제2대 칼리프 오마르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해치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의 정신적 지도자인 기독교 대주교의 안내를 받아 예수의 무덤이 있는 성묘(聖墓)교회를 둘러보던 중 기도시간이 되자 급히 교회 밖으로 나가 길바닥에 깔개를 깔고 절을 했다. 교회 안에서 기도할 경우 무슬림들이 그 자리를 신성시해 성묘교회를 없애려 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십자군의 무자비함은 상당 부분 무지에서 비롯됐다. 물론 그들이 예루살렘 정복에 나선 직접적인 계기는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성지를 되찾자"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동원령이다. 교황은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고려했고, 귀족들은 전리품을 노렸고, 수도사들은 순례(巡禮)와 함께 성물(聖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실속도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병사로 참여한 농민들은 단순하고 무식했다. 이들은 천년왕국이 곧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서둘러 참회와 속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재산을 팔아 무기와 식량을 마련했다.

농민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십자가를 지고 성벽을 돌며 기도했다. '신의 뜻'에 따라 나선 그들이기에 기도로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예리코 성을 공격할 때 성 주위를 돌며 함성을 지르자 성이 무너졌다는 구약의 기록처럼. 이처럼 무지몽매한 농민들의 생각에 이교도인 악마를 죽이는 것은 천국에 한 발짝 다가서는 선행의 일종이었다. 이런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많은 무슬림은 미군을 '21세기 십자군'으로 부르는 빈 라덴의 주장에 공감할 것이다. 마침 정부가 추가 파병을 확정한 지난 18일 "미국과 협력국에 저항하라"는 빈 라덴의 음성 메시지가 공개됐다. 한국군은 십자군이 아니며, 십자군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