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核 성명' 中·러 반대로 무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태국 방콕에서 21일 폐막된 제11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막후에서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가 북핵 문제에 대한 특별성명 채택을 둘러싸고 치열한 물밑 외교전을 벌였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은 21일 북한의 핵개발 계획 폐기를 촉구하는 특별성명 채택을 제의했다.

교도(共同)통신에 따르면 일본이 당초 준비한 초안에는 "한반도 비핵화가 동아시아와 국제사회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으며 6자회담에 대한 지지도 표명하고 있었다.

또 일본은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문제와 관련, 특별성명에 '가맹국의 우려'라는 문구를 삽입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후진타오(胡錦濤)중국 국가주석은 대북 특별성명 채택에 반대했다.

북한을 자극할 경우 자칫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러시아도 평양을 자극할 만한 성명 채택에는 반대했다.

결국 APEC은 대북 특별성명 채택을 포기했다. 논란 끝에 북핵 문제는 의장 요약문에서 언급하는 선으로 낙착됐다. 그 결과 탁신 치나왓 태국 총리는 이날 오후 요약문에서 "APEC의 21개국 정상은 한반도 평화와 모든 회원국의 안보 관심사를 위해 노력한다"고 다소 두루뭉술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또 "우리는 6자회담 재개를 지지하며 한반도에서 핵무기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도록 확실하고 믿을 만한 진전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APEC 회의장에 이날 북한이 또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한 일본 대표단 관계자도 "미사일 발사는 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고 말했다.

한편 외교 전문가들은 1989년 출범한 APEC이 경제협력체에서 점차 '안보포럼'으로 성격이 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북핵 문제는 당초 APEC의 공식 의제가 아니었으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회의에서 '대북 다자 간 안전보장'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는 미국의 이 같은 움직임을 겨냥, "경제협력체로 창설된 APEC의 의제가 경제 문제에서 안보.군사.정치 문제로 옮아가는 데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BBC는 "전세계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여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돈독히 하자는 것이 APEC의 목적"이라며 "올해로 14년을 맞은 APEC이 각국 정상의 훌륭한 자유토론장이 됐다"고 말했다.

최원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