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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과 고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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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가 열리면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이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핀란드 등은 클럽 단위의 스포츠가 매우 발달한 나라다. 유럽축구선수권대회나 월드컵 축구대회 같은 대형 이벤트가 열리면 8세기 말 반도를 박차고 나와 온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바이킹처럼 무수히 많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자국 팀을 응원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아이콘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웨덴과 노르웨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의 스포츠 강국 팬들이 저마다 바이킹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점이다. 그들은 뿔 달린 모자를 쓰고, 응원용 모형 도끼를 휘두르며 의기양양하게 유럽 대륙으로 남하한다. 그들의 당당한 체격과 눈부신 금발은 강렬한 인상을 준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몰려나오는 바이킹을 맞이하는 또 다른 바이킹이 있다. 덴마크 바이킹이다. 극성맞기로 따진다면, 그리고 그 극성맞음이 용맹함의 변주(變奏)라면 덴마크 스포츠맨들이야말로 바이킹을 닮았다.

이 다양한 바이킹, 즉 응원단은 자국팀의 경기가 끝날 때까지 격렬한 응원전을 벌인다. 네 나라 바이킹이 '원조'를 자처하지만, 스포츠 분야에서 진짜 바이킹은 경기나 대회가 끝나봐야 확인된다. 그리고 그 진짜 바이킹이라는 것은, 매번 바뀌곤 한다.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바이킹만이 마지막까지 경기장에 남아서 외신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기 때문이다.

바이킹은 역사의 실재이자 북유럽의 신화이며,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자기정체성이다. 우리는 고대사 속에서 바이킹처럼 세계와 역사를 뒤흔든 기억을 고구려에서 찾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구려는 바이킹처럼 유쾌한 쟁탈의 대상일 수 없다. 영혼의 정수가 담긴 실체적 존재로서 우리 고대사의 하이라이트이자 현재를 있게 하는 정체성의 총화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를 외치는 한국인의 음성에는 비장미가 담긴다. 동아시아를 호령한 고구려는 지울 수 없는 영광의 기억이며, 고구려인이 누빈 만주며 요동벌은 잃어버린 대지를 상징한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은 우리에게 알렉산드로스보다 위대한 정복대왕으로, 호태왕비(好太王碑)는 그 비문의 토씨 하나도 양보할 수 없는 우리 고대사의 자산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중국이 고구려와 그 후예인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간주하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는 동북공정을 진행하니 우리의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사에 편입하고 대동강 이북까지 고대 중국의 강역에 포함한 동북공정은, 역사 왜곡은 물론 통일한국의 미래까지 위협할 수 있는 폭약을 숨기고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이 붕괴할 경우 그리고 동북공정의 결과가 중국의 공식 사관으로 완성됐을 경우, 중국은 대동강 이북에 대한 중국의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동강은 국경선으로 바뀌고 통일 한국은 다시 한번 통일신라시대의 강역으로 축소된다. 동북공정이 적재한 폭발력이 이토록 엄청나기에 그 추이를 지켜보는 한국인들이 예민하지 않을 수 없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동북공정은 우리의 혈통적 기원과 정체성마저 위협하는 정신과 문화의 침략이기에 '단순한 학술연구'라는 중국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역사 전쟁'은 이미 시작됐고 지난 역사가 말하듯 이번에도 국경선은 중국이 먼저 넘었다. 이번 '전쟁'은 스포츠처럼 그때그때 승자가 바뀌어도 좋은 전쟁이 아니다. 필승만이 살길인, 긴 싸움이 될 것이다.

허진석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