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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뿌리 한국문화 제4부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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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필자는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의 위촉으로 경도일원의 조사를 하였다.
대판의 매전역에서 경판신 급행 전철 경도행을 타면 약35분만에 계역에 닿는다. 역앞에서 답괘행 버스를 타고 약15분쯤 가면 종점인 답괘정류장이 나온다.
이 부근은 경도시 변두리의 신주택가이므로 한산하고 공기가 맑아서 도시생활에 시달린 필자에게는 신천지와 같은 느낌이 든다. 버스 정류장부터 약1백m쯤 가면 대나무가 우거진 산기슭에 좁다란 산길이 나타난다. 바로 그 옆에 「환무천황어모어능모」라고 음각된 비석이 세워져 능으로 가는 길임을 알려주고 있다.
필자가 일본 황후의 능을 찾은것은 능의 주인공 신립황후가 백제국성왕의 후손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일본서기』를 보면 서기504년(무령왕4년) 백제국 순타태자(후일의 성왕)의 왕자인 사아군이 수교사로 일본에 도착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가 일본에 머물면서 낳은 아들이 법사군이며, 그의 후손(도중에 몇대가 있는 모양인데 분명치 않다)을 야마토노오토쓰구(화을계)라고 하였다. 즉 성은 야마토(화)씨고 이름은 오토쓰구(을계)인 것이다.
니가사(신립)는 을계의 딸로서 일본의 황족인 사라카베(백벽)왕의 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사라카베왕의 부친은 시키(시기)왕이고 조부는 덴치(천지)천황이다. 덴치 천황의 아버지가 조메이(서명) 천황인데, 그의 치세인 631년 백제국의자왕의 왕자인 풍왕이 야마토(대화) 조정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하여 일본에 왔었다. 풍왕은 야마도 조정의 후대를 받고 그의 후손들은 일본에서 문무 양면으로 활약하며 고위직에 많이 등용돼 7세기후반부터 「백제왕」씨라고 불리게 된다.
이상과 같이 백제국과 일본국은 단순한 우호관계뿐만아니라 일종의 연합체제를 유지하며 상부상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메이 천황의 황후가 후일 즉위하여 사이메이(제명)천황이 되고 그의 아들인 나카노오에(중대형)황자가 황태자가 되어 국가를 다스리게 된다.
660년3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 그해 7월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그해 10월 백제의 중신인 좌평여복신(무왕의 종자)과 좌평귀지는 일본에 건너가 구원병과 함께 풍왕을 돌러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사이메이천황과 나카노오에 황태자는 스스로 백제구원군을 이끌고 나니와항(지금의 오사카)을 출발했으나 백촌강(금강입구) 전투에서 당해군에 참배했다.
그후 사이메이천황이 사망한뒤 나카노오에황태자가 즉위하여 덴치천황이 되었으나 야마토조정의 본거지인 대화지방(나양현)에서 백제구원의 실패를 추궁하는 반란이 일어나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5년후인 667년에 근강국(자하현) 대율에 천도하여 대율경(근강경)을 이룩했던 것이다. 5년후 덴치천황이 노쇠함으로써 양위문제가 일어났다.
후계자후보는 큰아들인 오토모(대우)황자와 둘째인 오아마(대해)황자였다. 덴치는 오토모 황자에게 양위하고 사망하니 그가 바로 고분(홍문) 천황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오아마황자는 황위에 미련이 없다는 듯이 삭발하고 요시노(길야) 산중에 들어가 황위 찬탈을 위해 지방호족세력을 결집한다.
672년 덴치가 사망하자 오아마는 동·서 양쪽으로 대율경을 침공하니 대율경은 잿더미가 되고 고분 천황은 자살하게 된다. 이 전란이 곧 「왕신의 난」이라고 한다. 승리한 오아마 황자가 즉위하여 덴무(천무)천황이 된다. 덴무는 대화지방으로 천도하여 아스카기요미하라 (비조정어원) 경이라 하였다.
와중에서 황족간에 체일 유력한 후보자였던 덴치의 후손 백벽왕이 즉위하여 고닌(광인) 천황이 되었다. 따라서 신립부인은 황후가 된 것이다.
고닌 천황과 신립 황후사이에 야마베(산부)·사와라(조양)왕과 노도(능등)여왕의 2남1녀가 있어서 고닌이 즉위한후 야마베가 황태자가 되었다. 그후 고닌이 양위함으로써 야마베가 즉위하여 간무(환무)천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백제성왕의 후손인 신립(희)이 광인의 황후가 되고 따라서 환무의 모후(황태후)가 되자 나양(평성) 경내의 황족들과 등원씨를 비롯한 여러 호족들, 그리고 동대사를 비롯한 7대관사의 세력이 일본황통에 위배됨을 이유로 소란을 일으킨다. 환무가 국가통치의 곤란을 느끼고 고민하고 있을때 경도로 천도하기를 권유하는 자가 있었다.
후지와라노오구로마로(등원소흑마여)라는 사람으로 나량시대의 대호족출신. 나량시대에 남가·북가·식가·경가의 4파(4형제의 후손)가 있는데 7대천황의 황후가 된 것은 남가의 후손들이었다. 소흑마여는 식가의 소생이었으며 특히 그의 모친은 경도지방에서 대호족으로 이름난 한족인 주씨였던 것이다. 소흑마여는 이와같은 입장이었으므로 경도천도를 권유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경도를 평안경이라부르고 1868년까지 1천여년간의 서울이었던 것이다.
신립(희)의 성은 원래는 앞에서 쓴바와 같이 야마토(화)씨였는데 황후가 된 이후로는 다카노(고야)씨라고 개성했다. 그후 그의 일족 35명도 고야씨라 개성하여 평안경으로 이주한 후 그들의 거주지가 지금도 좌경구내에 고야·고야천이라는 유명으로 남아있다.
이 고야라는 성의 유래는 그들 일족의 본거지인 대화국첨상군고야촌(나량시백호사부근)의 촌이름을 따 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속일본기』에의하면신립황태후는 788년에 별세하여 다음해 1월15일 대지능에 안장했다고 하니 평안경으로 천도하기 전에 별세한 것으로 추정되며 황자가 즉위하여 환무천황8년째다.
환무는 모후를 기리는 제문에서 「황태후의 용모와 덕행이 훌륭하고 뛰어났고 일찍이 평판이 높았으므로 부황(광인)이 즉위하기전에 부인으로 삼았다」라고 추모하였다. 모후에 대한 정성어린 찬사이겠지만 백제여성의 긍지를 드높였으며 일본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혼혈되였다는 사실을 과시해야 할 것이다.
경복 전철 평야선의 종점인 백매정역에서 내려 약1백m쯤 북쪽으로 가면 우측에 붉은색의 큰 조거옆에 「관폐대사평야신사」라고 음각된 비석이 보인다. 조거밑을 지나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면 벚나무를 비롯하여 숲이 우거져있다. 이곳은 봄철 벚꽃놀이로 유명하다고한다.
이 신사의 제신은 4명인데 주신은 이마키(금목)신이고 기타 구도(구도)신·후루아키(고개) 신·히메(비매)신등이 모셔져있다.
주신인 금목신은 이마키(금내)신의 자음가자로서 금내의 의미는 「지금 새로이 도래했다」는 의미의 관용어로 사용되는 상투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래의 일본고유의 신이 아니고 새로 일본에 도래한 신이라는 의미인데 그의 실제의 구체적 신명은 환무의 생모인 고야신립황태후의 시조인 도모(온조)왕인 것이다. 환무가 경도에 천도한 후 장안의 네군데에 수호신을 모신 것 중의 하나로 이 신사를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로 제주는 황태자가 임명했으므로 별명을 「춘궁(동궁=황태자)의 신」이라 불린 것이다.
다음의 구도신은 구도(교)신의 자음가자로서 쉽게 말하면 부뚜막(?)의 신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가정과 국가의 풍요를 비는 신인 것이다.
다음의 고개신의 정체는 불투명해서 설명하기 곤란한데 어떤 학자의 말에 의하면 고개는 한음으로 「고개」이니 한어의 「고개(현·판의 의미)」를 의미한다 하여 경도의 북산을 수호하는 신(무녀신)이라고 풀이하나 신빙성은 불명하다.
다음의 비매신은 비매가 「희」자의 일본 훈(훈)인 「히메」의 자음가자이니 여신을 말하는데 그의 실명은 신립황태후의 생모인 오에노마요시(대지진매)를 가리킨다한다.
이상 4신의 유래를 통해 알수있듯이 이곳은 평안경의 북쪽을 수호하기 위하여 환무가 모후와 관련있는 4신을 모시기 위하여 마련한 신사인 것이다.
앞뜰에서 제전을 바라보니 배전(배전)뒤에 장엄한 사당 4개가 늘어서 있어 무엇인가 신비스런 느낌이 들었다.
덧붙여 이지역의 지명은 구칭을 갈야군상림촌이라 하는데 이 지역에는 하야시(임)씨족이 살았다한다.
신찬성씨녹(815년에 편집된 관찬서)에 의하면 임씨는 백제사람인 목귀의 후손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같이 백제사람 정착지에 백제신을 모신 평야신사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환무의 의도적인 배려로 마련된 것이다.
단희인 <동국대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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