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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국회에 발목 잡힌 로스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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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 바람에 시설과 교수 확충 등에 막대한 투자를 해온 대학들만 발을 구르고 있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7월까지 전국 38개 대학(국.공립 12곳, 사립 26곳)이 건물을 새로 짓는 등 로스쿨 시설을 위해 1988억원을 쏟아부었고, 1700여억원을 추가로 투자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방의 한 사립대는 이미 시설 투자에만 400억원 이상을 지출했고, 서울의 몇몇 사립대도 200억원 이상씩을 투입했다니 생존을 건 출혈경쟁이 아닐 수 없다. 교수 증원도 대학 측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로스쿨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판사.검사 출신 등 실무 교수진을 대거 채용했다. 그러나 로스쿨 인가를 받는다는 보장도 없는 데다 언제 문을 열지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꼬박꼬박 인건비를 지출해야 하는 대학으로선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이다.

로스쿨 설치의 근거가 되는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국회 교육위원회에 제출된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 그럼에도 1년 가까이 법안이 처리되지 않고 있으니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일까. 유능한 법조인 양성에 적합한 제도를 만들고 로스쿨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민하면서 법안을 다듬느라 그랬다면 설사 개교가 1년 늦어졌다고 이를 비난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해당 상임위에서 한 번도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 채 법안심사 소위원회에 기약 없이 계류 중이니 문제다. 이렇게 된 데는 외형상 한나라당의 책임이 크다. 한나라당은 사립학교법 재개정과 로스쿨법 등 다른 법안들을 연계 처리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당도 사립학교법을 강행 처리함으로써 야당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법안 처리 지연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로스쿨은 법학 교육을 정상화하고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법조인을 양성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대학가는 전공과 관계없이 고시에 매달리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고시학원화됐고, 이로 인한 '고시 낭인(浪人)'들을 양산해 왔다. 사법시험 합격자를 1000명으로 크게 늘린 것도 '고시 열풍'을 부채질했다.

2004년부터 로스쿨을 시행 중인 일본의 법학 교육 실상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죽하면 1990년대 초 경제단체 간부들이 일본 사법을 '2할 사법'이라 불렀을까. 법률 분쟁의 8할이 국제무대 등 법정 밖에서 발생하지만 이에는 도움을 못 주고 법정에서 다뤄지는 2할에만 쓸모가 있다는 의미다. 그만큼 법조인의 국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일침이었던 셈이다. 이런 경제계의 요구로 로스쿨 도입 논의를 시작했고, 2004년 4월 문을 열었다.

법률시장 개방도 피할 수 없다. 현재 진행 중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도 미국 측의 요구가 거세질 게 뻔하다. 시장 개방 뒤 영.미계 로펌의 위력은 90년대 독일에서 입증됐다. 시장 개방 수년 만에 독일의 10대 로펌 가운데 9개가 영.미계에 흡수되거나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국내 법조인이 80%의 사건을 외국계 로펌이나 변호사에게 넘겨주고, 20%의 법정 사건을 놓고 우리끼리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러지 않으려면 경쟁력을 갖춘 전문가들을 조속히 키워내야 한다.

국회가 교육제도와 관련한 중대한 법안 처리를 미루고 있는 것은 직무유기다. 로스쿨 도입에 맞춰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은 대학들의 손해는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국회는 로스쿨의 발목을 잡고 있을 게 아니라 법조인의 경쟁력을 높일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

신성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