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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또 이사가?”/집없는 사람들의 설움: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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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쫓겨다니는 “내집 꿈”/국민 반이 셋방살이 신세/해마다 올라 변두리로 변두리로/전세돈 모자라자 끝내 자살까지
최근 전세임대료가 폭등,집없는 사람들의 설움이 갈수록 가중돼 시급한 민생문제의 현안이 되고 있다. 턱없이 오른 전세값을 이겨내지 못한 무주택자들은 본격적인 이사철이 되면서 더 작은 평수의 방을 구하기 위해 변두리나 지하셋방으로 우울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집없는 사람들의 설움을 잠재우기 위한 당국의 시책은 빗나가기만 해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무주택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고 있다. 무주택주민들의 실태와 구조적 문제점ㆍ대책등을 몇차례 나누어 살펴본다.〈편집자주〉
지난달 13일 낮12시 경기도 성남시 산성동 단독주택 지하방에 세들어 살던 이성남씨(54)가 전세값을 마련하지 못해 방안 냉장고 손잡이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
이씨는 전세금 3백50만원의 지하 단칸셋방의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집주인이 1백50만원을 올려달라고 하자 다른 전세방을 한달동안 찾아다녔으나 3백50만원으로는 일가족 6명이 살 수 있는 방을 구할 수 없어 이를 비관하다 목숨을 끊었다.
20년전 결혼해 서울 신설동 무허가 판잣집 셋방을 얻어 살면서부터 시작해 이씨부부가 그동안 집을 옮긴 것은 모두 16번.
『이사를 하도 많이 다녀 애들이 서너번씩 학교를 옮기는 것등은 이력이 났지만 이번에는 전세값 인상폭이 너무 커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었습니다.』 부인 우해숙씨(40)의 말이다.
고2인 큰딸 선애양(17)부터 9세짜리 막내 달래양(국교3)에 이르기까지 딸 4명과 함께 단칸셋방을 전전하던 이씨는 그동안 일해오던 꽃재배농장 잡역부를 그만두고 부인 우씨가 서울까지 나가 파출부를 하며 벌어오는 30만원으로 생계를 꾸려오다 갑작스레 전세값 인상을 독촉받았다.
이씨는 6평 크기의 셋방을 지키기 위해 여러 곳에서 돈을 빌리려 했으나 실패하자 『내가 못나 가족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방한칸 마련해 주지 못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씨 가족들은 이씨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쫓겨나 지금은 모녀 5명이 발을 뻗고 눕기에도 힘든 3백만원짜리 3평크기의 전세방(성남시 산성동 1417)에서 살고 있다.
이씨처럼 전세값 인상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람이 최근 한달사이 서울에서만도 모두 3명.
희생자들은 전부 전세금 5백만원 내외의 단칸셋방 세입자들이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전세값 폭등에 따른 불만은 폭발직전이다.
서울 신림동 단독주택 2층 방 두칸을 1천8백만원에 전세로 살던 김명순씨(42ㆍ외판원)는 전세값을 7백만원이나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견디다 못해 부근 연립주택 지하셋방 두칸짜리로 옮겨갔다.
또 서울 이문동 단독주택 방 두칸짜리 지하에서 1천5백만원에 전세를 살던 윤희수씨(33ㆍ회사원)는 전세금을 5백만원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돈을 마련하지 못해 전세보증금은 그대로 둔채 월세로 한달에 7만원씩 주기로 하고 겨우 쫓겨나는 신세를 면했다.
서울 양평동의 5백만원짜리 단칸셋방에 살던 김경준씨(32)는 일요일인 18일 3백만원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떠밀려 환갑이 넘은 노모를 비롯,네식구를 데리고 경기도 군포로 이사를 했다.
구로공단 T기계공장에서 5년째 선반일을 하는 김씨는 이사를 하는 바람에 출퇴근 시간이 2시간 가까이 늘어났고 콩나물지하철에서 매일 시달려야 했다.
김씨는 『지난해 한달에 걸친 노사협상끝에 임금이 18%인 8만2천원이 인상되었는데 기껏 모아도 1백만원에 불과해 3백만원 인상요구에는 턱없이 모자랐다』며 『올해 임금협상에는 전세값 인상분까지 포함해 임금이 크게 올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만 앉아서 손해보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또 『요즘 빌딩매매/보증금 1억에 임대수입 3백만원등의 신문광고를 보면 부아가 치민다』며 『가만히 앉아 올라가는 임대료로 향락을 일삼는 사람 따로 있고 우리는 뼈빠지게 일하고 저축해 봤자 남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의 말처럼 최근 한국노총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근로자 가운데 20.4%가 아예 내집마련의 가능성을 포기했고 50% 가까이가 20년내에 집은 장만하기 힘들다고 스스로 내다보고 있어 지난해 주택가격폭등과 올해의 전세가격 폭등에 얼마만큼 큰 좌절을 느꼈는지 쉽게 알수 있다.〈이철호ㆍ남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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