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비극' 딸 치료비 감당못해 인공호흡기 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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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병에 걸린 딸의 치료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이를 못 견딘 가난한 가장이 딸의 인공호흡기를 꺼 숨지게 했다.

지난 12일 밤 서울 용산구 후암동 全모(49.무직)씨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비극은 全씨의 딸(20)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경추탈골증후군이라는 희귀병에 걸리면서 시작됐다. 중3 때 손발이 마비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기도(氣道) 손상으로 혼자 숨을 쉴 수 없는 상태가 됐다.

2000년 12월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그때부터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목숨을 유지했다.

지난 3월 TV 자선프로그램에 소개돼 2천여만원의 성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들어가는 치료비를 감당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全씨의 아들(24)은 "6년간 들어간 치료비가 3억원이 넘었으며 한달에 1천만원이 넘게 들어갈 때도 있었다"고 울먹였다. 가족들은 치료비 때문에 지난 8월 노원구 상계동의 6천만원짜리 집을 팔고 보증금 5백만원에 월세 70만원인 현 주거지로 이사했다.

얼마 전 全씨마저 일자리(택시운전)를 잃으면서 더 막막해졌다. 부인(47)은 24시간 딸을 수발하느라 다른 일은 엄두도 못 냈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술집 종업원으로 취직한 아들 수입만으로 네 가족의 생계를 근근이 이어갔다.

서울대병원에 밀린 치료비 1천5백만원을 포함해 어느덧 빚만 5천만원이 넘었다.

全씨는 그날 밤 딸의 산소호흡기 전원을 껐다. 부인은 전날 돈 문제로 크게 싸운 뒤 친정에 가 있었다.

집을 나와 강소주를 마시다 20분 뒤 되돌아갔더니 딸이 눈을 뜬 채 죽지 않고 있었다. 뒤늦게 후회한 全씨는 119에 구조요청을 했다. 엉엉 울며 병원으로 데려간 딸은 그러나 이미 뇌사상태에 빠진 뒤였다.

결국 딸은 16일 최종 사망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全씨는 17일 부인의 신고로 딸의 장례식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全씨는 경찰에서 "너무 살기가 힘들었다"며 통곡했다. 그는 19일 서울 용산경찰서에 살인혐의로 구속됐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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