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의광고로보는세상] 멈출 수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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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야쿠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를 조사한다면 아마 '오토코(남자)'와 '카오(얼굴.체면)'란 답이 나올 것이다. 싸움에서 도망을 친다든가 상대에게 모욕 당했는데도 가만히 있는다든가 하는 것은 '사나이 체면을 잃는 행위'로서, 진짜 야쿠자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야쿠자뿐 아니라 보통의 일본인에게도 체면은 중요하다. 회사가 부도 나면 사장으로서 체면을 잃었다고 자살하는 경우가 일본에서는 흔하다. 또 다른 사람의 체면도 내 체면만큼이나 소중하게 생각한다. '말과 사슴도 구별 못하는 바보 같은 놈'이란 뜻의 '바카'와 '짐승 같은 놈'의 '칙쇼' 외에는 이렇다 할 욕이 일본어에 없는 것도, 병적으로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는 '키쿠바리(氣配り)'도 체면 중시에서 비롯한 것이다.

제복 입은 경찰이 달아나는 범인을 쫓는다. 경찰은 큰 목소리로 "서라! 거기 서!"하며 열심히 쫓아간다. 범인은 '힘들어 죽겠다. 그만 뛸까?'라는 생각을 하지만 어쨌든 계속 도망간다. "서라!" 외치며 뒤쫓고 있는 경찰 역시 속으로는 '서란다고 저 놈이 서겠어?'하고 생각한다. 범인 역시 '서란다고 서는 놈 봤냐?' 생각하며 달린다.

숨이 턱에 닿을 정도가 된 범인은 차라리 잡히고 싶다. 그런데 지쳐 멈추면 범인으로서의 '체면'이 안 선다. 그래서 생각한다. '왜 저 경찰은 드라마에서처럼 "안 서면 쏜다!"라고 하지 않는 걸까? 그 말만 하면 바로 설 텐데…'. 경찰도 생각한다. '안 서면 쏜다고 말해볼까?' 범인도 간절히 원한다. '왜 빨리 안 서면 쏜다고 말하지 않는 걸까?' 그런데 뛰면서 경찰이 다시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가 걸린다. '안 서면 쏜다고 했는데도 계속 도망가면 어쩌지? 그때 안 쏘면 거짓말을 한 게 되나? 쐈는데 총알이 빗나가면 창피해서 어쩐다? 맞히더라도 적당한 신체 부위에 맞힐 수 있을까?' 범인은 헉헉대며 속으로 애원한다. '안 서면 쏜다고 어서 좀 말해!' '말할까?' '어서!'

'전달되고 있을까?'라는 자막과 함께 일본의 통신회사 KDDI 광고는 막을 내리지만, 지켜보는 많은 시민 앞에서 경찰로서의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또 지쳐서가 아니라 총 때문에 잡혔다는 범인으로서의 '명분'을 찾기 위해 둘은 지금도 여전히 달리고 있을 것이다.

차기 일본 총리로 꼽히는 아베는 극히 추상적이며 우회적인 '애매한 어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외교 당국자들은 당분간 '아베 어법'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아베는 사실 지극히 '일본적인 어법'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총리로서의 '체면'이 어떠한지 파악하는 것이 아베 어법을 이해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김동완 커뮤니케이션즈인디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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