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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평가 거부하는 국내 대학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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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최근 미국 시사잡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세계 100대 글로벌 대학에 한국 대학이 한 곳도 없었다. 자성의 목소리가 높지만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외국 언론들이 세계 대학 평가를 할 때마다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개선될 가능성이 작다는 데 있다.

사실 우리 대학들의 여건은 선진국에 비해 매우 열악하다. 고등교육 투자는 선진국의 절반을 밑돌고, 정부 규제로 대학들은 옴짝달싹하기 힘들 정도다. 그렇다 해도 세계 경제력 12위에 걸맞은 세계 100대 대학이 없는 것은 문제다.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해온 주요 원인이 있다. 빈약한 대학 평가 문화다. 어느 분야든 평가는 자극을 주고, 경쟁력을 키우는 약이다. 그래서 글로벌 경쟁 시대를 맞아 대학 등 고등교육 평가를 강화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미국.일본 등 60여 개국에는 고등교육 품질보장 시스템이 있다. 대부분 국가에선 평가 결과가 학생.기업체 등 교육 수요자에게 공개되고, 재정 지원과 연계된다. 지난해는 유네스코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국경을 넘는 고등교육 공급의 질 관리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자유무역협정(FTA) 등으로 국가 간 고등교육 교류가 활발해지자 각국이 교육 소비자를 위해 대학의 질 관리를 강화하자는 취지다. 협약 가입 시 고등교육 평가체제 구축과 정보 교류가 의무화됐다.

이에 비해 우리의 평가 제도는 유명무실하다. 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등이 정부 위탁을 받아 5~7년마다 대학.학과를 평가하지만 엉성하기 짝이 없다. 결과는 두루뭉수리로 발표되고, 정보 공개도 거의 없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뒤늦게 세계 수준의 고등교육 질 관리 시스템을 갖춘 '고등교육평가원'을 만들겠다며 '고등교육평가법'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표류 중이다.

더 큰 문제는 평가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확산된다는 점이다. 대교협 평가의 경우 2003년 이후 일부 학과 평가가 무산되거나, 주요 대학이 빠진 채 실시됐다. 올해는 대교협은 물론 공학교육인증원.간호학평가원의 평가를 거부하는 학과들이 생겼다. 서울대는 종합평가마저 거부했다. 이들은 "현행 평가방식이 대학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인 양적 평가여서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평가받을 의무도 없고 평가 결과가 정부의 재정 지원과도 무관하니, 괜히 힘들게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평가가 대학 서열화를 고착시킨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오히려 평가가 없다면 과거 지명도에 의해 만들어진 서열화는 영원할 것이다. 반대로 평가가 활성화되면 명성에 젖어 나태한 대학과 열심히 노력하는 대학의 실상이 확연히 드러나고 서열화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중앙일보가 13년째 매년 실시하는 대학평가가 선의의 경쟁을 일으키고, 대학가를 변화시킨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평가에 열심인 대학은 여러 면에서 유리해진다. 우선 교육의 질이 높아진다. 평가 결과가 좋은 대학.학과들은 "사회의 평판이 좋아졌다"고 강조한다. 삼성전자가 신입사원 선발 시 공학교육인증원의 인증을 받은 대학 출신을 우대하듯이 대학 평가 결과에 주목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반면 제대로 된 평가 문화가 계속 없는 한 세계화 시대에 뒤처질 것이 뻔하다. 당장 우리 학생들이 외국 기업에 취업하거나 외국 대학에 유학 갈 때 불이익을 받게 된다. 세계의 인정을 받지 못한 대학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국유학 학생들이 늘어난다. 반대로 우수한 외국학생들은 우리 대학을 외면할 것이다. 결국 대학과 사회의 손실이다. 우리 대학들도 이를 잘 알 텐데 왜 평가를 거부할까. 외부에선 "평가 결과가 나쁘면 망신당하거나, 구조조정 대상이 될까 걱정돼 거부한다"는 말도 나온다. 정말로 그렇다면, 지독한 이기주의다. 얼른 제대로 된 평가 시스템과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오대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