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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풀어야 할 「호남 소외」/김상기 자유기고가(논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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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종교개혁의 질풍노도속에서 3만명의 「유그노」들이 프랑스에서 학살당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 치명적 타격으로 힘을 잃은 유그노는 주로 저술을 통한 사상투쟁을 전개하여 네덜란드와 영국의 민주사상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유니우스 브루투스라는 익명으로 출간된 팸플릿 「폭군에 대항하는 자유의 옹호」는 정치사상사의 고전이다.
군주가 인민과의 서약을 어기고 이들을 해치면 이것은 그가 신과의 성약을 어기는 것이므로 인민전체를 대표하는 자가 군주를 폐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의 골자다. 그리고 법통을 이어받아 즉위했으나 폭정을 일삼는 군주보다는 변칙적으로 왕권을 잡았더라도 법도를 지켜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는 군주가 더 좋다고 한다.
민주주의란 한갓 정부의 체제나 제도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내면적 자유와 양심의 자발적 동의에 근거함을 설파하면서 피치자의 입장에서 정치의 실용성에 정통성을 두고 이를 법통에 우선시키는 것이 흥미롭다.
칼빈주의 정치사상을 왜 들먹이는가. 3당의 합당으로 공룡여당이 생겼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정치인들이 조락해가는 정치생명을 연장하려고 오직 사략을 위해 원칙도 명분도 없이 야합했다는 비판의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정국의 표류가 끝나 안정을 누리게 될 것을 조심스럽게 기대하는 심리도 널리 퍼져있는 듯하다.
비잔틴 궁정음모를 무색하게 하는 밀실의 정치거래와 흥정의 내막은 알고 싶지도 않고,사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다. 칼빈주의자조차 정치인이 권력욕의 화신이 되어 집권을 획책하는 것을 국민을 위한다는 조건부로 받아들였다면,우리도 야합이 타협과 화해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 실천 여부에 따라 신당을 지지할 수도,반대할 수도 있는 일이다.
신당은 계층의 갈등,세대간의 갈등,지역간의 갈등을 해소하겠다고 한다. 계층의 갈등은 계급의 문제,즉 자본과 노동의 모순 문제다. 자본축적의 법칙,경제성장의 논리는 근본적으로 분배의 정의와 모순될 수밖에 없으며,보수정당의 한계는 이미 명백히 드러나 있으므로 신당이 계층의 갈등을 전향적으로 해결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계층의 갈등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큰 신당이 세대의 갈등을 해소시키리라 기대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학생ㆍ젊은이들의 항거는 항상 분배의 정의ㆍ사회정의에 대한 요구의 표현이다. 형평보다는 성장을 우선시킬 신당은 젊은이들과 길고도 험난한 갈등을 각오하고 인내력을 미리 배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세대간의 갈등은 빠르게 변하고 발전하는 모든 사회에 공통되는 현상이며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역동성의 표현이므로 구태여 없애야 할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신당이 해결해야 할 근본문제는 결국 지역간의 갈등,즉 호남소외의 문제다. 신당이 호남에 뿌리를 내리고 호남이 정국의 주도권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일을 해나간다면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이 당을 지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호남소외를 극복하여 국민통합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도덕성 회복문제이고 이것은 정국안정과 통일운동의 선결조건이다.
이 당위론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비호남 정치인들이 모여 만들어 낸 정당이 이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인가. 정치인들이 당략과 사리를 위해 해괴한 일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이들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들도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평민당을 포함하는 대연합을 다시 만들어 내는 길이다. 평민이 온건과 중도를 표방하고 있으므로 신당과 정책노선 때문에 합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결국 양 김씨 라이벌관계 때문에 일이 어렵게 되어있는데,노대통령이 임기를 마친후 3김씨의 「트로이카 체제」로 나가는 것이 나쁠 것도 없다.
내각책임제ㆍ이원집정제,심지어 위인설관까지도 호남이 국정에 실세로 참여하는 길을 여는 조치라면 명분에 얽매여 배척할 이유가 없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 김씨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차선의 길은 호남이 대거 신당에 참여함으로써 비호남지역당인 신당을 타협과 화해의 전국적 보수당으로 발전하도록 해주는 길이다.
호남이 대승적으로 지역성을 깨뜨리고 나오는 것은 동시에 평민당이 그 지역성을 넘어서 전국당으로 되는 확실한 길이 될 것이다. 호남의 의인들,예컨대 홍남순 변호사ㆍ조아라 여사ㆍ윤공희 대주교ㆍ이돈명 총장ㆍ송기숙 교수 같은 분들이 직접 나서서 호남과 비호남을 함께 설득한다면 국민통합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최악의 길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즉 호남소외를 외면하고 민주와 반민주,양심과 비양심,통일과 반통일,민중과 군사독재,민족과 외세 등 흑백의 반대항을 설정해 놓고 끝없는 소모전으로 치닫는 길이다.
호남소외는 망국의 함정이요 블랙 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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