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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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문학이란 학문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문학작품들인 시나 소설·수필 따위를 읽는 것도 과연 공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돌아 가셨지만 적어도 나의 아버지께선 분명히 그런 독서를 공부가 아닌 것으로 처음엔 판단하였음에 틀림없다. 내가 대학 국문학과를 나오고 또 여러 문학작품들을 직업적으로 읽으며 그걸 학생들에게 가르쳐 밥벌이하는 것을 알게 되었던 당신은 돌아가시기 얼마전까지는 문학이라는게 공부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눈치를 별로 보인적이 없지만, 중·고등학교시절 만고에 책읽는 재미밖에 모르던 아들에게 당신은 늘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었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도 않고 소설이나 읽어 뭘하려고 하느냐』는 책망도 여러번 나는 들었다.
그런데 지금 문학작품 읽는 법을 강의하며 월급을 받고 있고 수시로 소설이나 시내용이 어떻고, 작가의식이 어떻다는 등의 글을 써서 원고료까지 받고 있는 나는 과연 소설과 시 읽는 행위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가. 아니좀더 솔직히 말해 기말시험이나 중간시험을 며칠 앞둔 중·고등학생 아들. 딸이 이청준의『자유의문』이 어떻고, 프로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어떻다고 내 앞에 와서 지껄여 댄다면 당장 내머리 속에 무슨 말이 떠오를까. 틀림 없이 나도 내 아버지처럼 『해야 할 공부는 하지도 않고 소설이나 읽고 있는거냐』고….그러나 나는 꾹 참는다. 문학교수가 그런 말을 어찌 함부로 내뱉는단 말인가. 이율배반이 아닌가·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 앓는 형국이다.
공부란 역시 시험에 대비한 쓸모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고정관념을 우리는 모두 갖고 있는 것 같다. 시험을 다르게 표현하면 현실적인 실제 이익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문학작품들이 중·고등학교 교과서 속에 일단 채록되는 순간 그것은 엄청난 의미와 의문부호로 둔갑하기 일쑤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어떻고, 도치와 병렬이 어떻고, 영원과 순간이, 상징과 은유가 어떻고 어떠하다는 식으로 작품은 온통 갈기갈기 찢어지고 난자당해 그것이 미처 향수되고 즐기게 되기 전에 공부의 죽어버린 어떤 대상이 되고 만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마음에 드는 시 여남은 편쯤, 소설작품 여남은 편쯤 마음 속에 지닌 사람이 드물 것이라는 내판단이 틀리기만 바란다.
대학입시를 위해 특별히 많은 노력을 들여 억지로 왼 시편이 아닌 시 여남은 편을 어느자리에서나 암송할수 있고 얘기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게 진짜 산 문학교육이 아닐까.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 전편을 읽고 나서 머리속에 인상깊게 박힌 인물의 개성이나 그의 인격이 내뿜는 철학적 향기, 혹은 뜻깊은 명구들을 가슴속에 남기게 된다면 그게 나는 훌륭한 문학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불행하게도 문학을 즐기고 향수하기 전에 시험합격이라는 이익으로 자리바꿈 되도록 보는 버릇에 길들여져 왔고, 또 그렇게 문학작품을 공부내용에 편입시킴으로써 작가나 시인들로 하여금 쓸데 없는(?) 난해병에 걸리게 한 경우도 없지 않음을 나는 안다. 문학작품이 학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와는 다르게, 그것들을 많은 시간을 들여 읽고 명상하며 상상케 하는 것이 문학교육의 첫 단계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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