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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체제문학도 소비에트문학 범주로 수용" |모스크바 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 연구소 교수 김려호박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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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모스크바 과학 아카데미」는 소련의 최고 지성들이 모인 소련학문의 메카.
이 아카데미의 세계문학연구소 교수김려호박사(60·러시아문학)가 일본법정대교환교수로 일본에 갔다가 동국대일본학연구소 초청으로 방한했다.
김박사는 함남 함흥출신으로 해방직후 북한당국의 지원으로 소련유학중 김일성개인숭배를 비판, 귀국길이 막혀 소련에 정착했다.
김박사는 북한식 억양과 말투였지만 시원시원하고 꾸밈없는 태도와 소박하고 품위있는 외양등으로 전형적인 학자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소련의 변화등에 관해 들어보았다.
―소련은 고르바초프 등장이후 엄청난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소련에서 보고 느끼는 변화, 즉 페레스트로이카는 어떤 것입니까.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것이 기존의 소련사회를 개혁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일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서방의 일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사회주의의 부정이 곧 자본주의는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사회주의를 되찾자는 것이죠. 순수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는 더 좋은사회, 더 깨끗하고 명랑한 사회, 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근본적 가치를 보존하면서 자본주의의 높은 생산력과 같은 강점을 인정하고 수용하자는 것이죠.』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안에서의 학문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 짐작됩니다.
『물론이죠. 페레스트로이카란 신사고를 의미합니다. 즉 가치관의 변화죠.
가장 큰 변화는 복수의견의 인정입니다. 과거의 유일사상·단일이론이 학문발전의 최대 저해요인으로 비판받았죠.
문학의 예를 들자면 과거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이 유일한 문예사조였고 소비에트 문학전통을 창조한 고리키만을 위대한 고전작가로 인정했죠. 하지만 이제는 다양한 사조가 인정되고 최근 복권된 「닥터 지바고」의 파스테르나크도 훌륭한 러시아문학가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망명문학」의 인정도 또 다른 큰 변화입니다. 대표적 예는 미국에 망명한 솔제니친이지만 이밖에 과거에 파리나 인도·일본등으로 망명해 창작활동을 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이제는 소비에트문학의 일부로 인정하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소련학계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사관의 문제입니다. 유물사관이외의 사관을 인정하게됨에 따라 혁명이후의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 시도되고 있죠.』
―최근의 민족분규에서 보듯 페레스트로이카의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문제는 경제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미 흐루시초프때 시도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소련인들이 그러한 변화·개혁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기 때문에 흐루시초프의 실각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소련인들이 개혁을 요구하고 있죠.
다만 정치·언론분야등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경제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어 불만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70년간 계속돼온 경제시스팀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혁을 요구하던 사람들도 개인경영과 시장경제에 대한 경험이 없어 심리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제 경우 얼마전 모스크바작가동맹으로부터 모스크바 교외의 좋은 땅을 무상으로 불하받았어요. 채소를 가꾸든, 별장을 짓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런 땅을 받기 싫어합니다. 귀찮다는 것이죠.
그래서 소련인들은 헝가리·체코등 동구의 변화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규모도 작고 사회주의경험도 짧은 유리한 입장의 동구국가들이 먼저 개혁에 성공한다면 거대한 소비에트의 성공도 기대해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민족문제도 결국은 경제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88년 최고인민회의에서 라트비아공화국이 「아이를 3명이상 낳은 여자에게 5년간 유급휴가를 주자」는 법의 채택을 주장했을때 우즈베크공화국대표가 「우리는 2년이상 휴가를 줄수 없다」고 반대했었죠.
결국 사회주의적 평등을 주장하는 우즈베크공화국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라트비아공화국 사람들이 더 많은 휴가를 즐길수 없게 된 셈입니다. 그러니 라트비아는 소연방으로부터 독립해 이웃인 핀란드처럼 선진국이 되고 싶어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민족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소련의 한인문제로 화제를 돌려보죠. 소수민족이지만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소련에서 한인들의 이미지는 매우 좋습니다. 대부분 굶주림과 일제의 강압을 피해 이주해온 농민출신 1세들에서부터 「일잘하고 정직하며 교육열이 대단한 민족」이란 이미지가 굳어졌고 2세들이 자라면서는 「머리가 좋은 민족」이란 이미지가 덧붙여졌습니다.
각분야에서 한인들의 활약상은 대단해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인 「모스크바 과학아카데미 정식회원」(종신제)이 된 막심 파블로비치 김씨(러시아역사학자)는 가장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한인이 많이 사는 카자흐공화국에는 장관급인사도 많아 공화국정부에서 상설 조선인극장을 짓고 있습니다.
아나톨리김은 외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 작가이고, 시인이면서 희곡작가인 유리김도 전국적인 유명인사입니다.』
―김선생님과 같은 1세는 우리말을 대부분 할수있지만 2, 3세로 내려가면서 우리말을 할수있는 사람을 보기가 힘든 것 같던데요.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한인의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어요. 어떻게보면 필연적인 추세이기도 하지만 전통은 지키고 가꾸어야죠.
이를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자치주 확보와 조선인학교 설립입니다.』
―앞으로는 소련과의 교류가 점차 많아지리라고봅니다만….
『올림픽을 계기로 각종문화행사등이 소개되면서 주위의 소련인들이 「훌륭한 문화민족」 이라며 악수를 청해 오더군요.
지금도 모스크바에는 한국의 많은 기업인들이 경제교류를 위해 와있지만 우선은 예술·공연단체들이 많이 오는게 중요합니다.
일본을 가장 잘 알려준 것은 그들의 전자제품이 아니라 전통극인 가부키였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 관심있는 학생들의 유학도 권하고 싶습니다. 소련에는 외국인을 위한 러시아어 교육기관이 많고 비용도 거의 필요없습니다.』
―앞으로 하고싶은 일은….
『세계문학 연구소에서는 지금 세계문학사를 펴내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국문학이 포함돼 있는데 모두 북한문학 일색이어서 이번에 남한쪽 자료를 많이 가져가 완전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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