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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오락실 뒤에 '기업형 조폭'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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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행성 도박게임 파문으로 전국의 게임장이 개점휴업 상태인 가운데 서울 포이동의 한 성인 PC방 앞에 경찰의 경고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김형수 기자

지난달 초 부산시 서면의 A성인오락실. 하루종일 게임기에 매달려 있던 50대 남자가 새벽 3시쯤 "야 이 ××들아. 니네가 기계 조작해 놨지"라며 갑자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업주 측이 성인오락기 '야마토'의 승률을 조작해 놔 수백만원을 날렸다며 종업원들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깍두기 머리'를 한 건강한 체격의 '어깨' 두 명이 나타나더니 이 남자의 양팔을 잡고 "사장님 다칩니다. 그만 하시죠"라며 밖으로 끌고나갔다.

최근 들어 이 같은 풍경은 성인오락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조직폭력배들이 성인오락실 운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조폭은 오락실 뒤를 봐주거나 '보호비'를 갈취하던 과거의 수준에서 벗어나 직접 오락실을 운영하거나 기계제조사에 투자하는 '기업형 조폭'으로 성장하고 있다.

◆ 전국에 '조폭-오락실 커넥션'=사정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서울 종로지역의 '영광파'와 부산시 남포동 일대의 '신20세기파'가 가장 적극적으로 성인오락실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영광파와 신20세기파는 이미 1990년대 빠찡꼬 사업을 벌이면서 축적한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광파의 경우 2002년 종로 일대에서 '스크린 경마장'을 운영하면서 직접 성인오락실 사업에 참여해 흐름을 주도했다. 영광파는 상품권 발행업체에 투자하고, 신20세기파는 오락기 제조업체와 상품권 발행업체의 지분을 가진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다.

대도시뿐만 아니라 중소도시 조폭들도 성인오락실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전주의 '월드컵파'는 유흥가의 성인오락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청주의 '화성파'는 성인용 PC방 지역총판을 맡아 가맹점을 모으다 경찰에 적발됐다.

유흥업소에 진출했던 대형 조폭들도 성인오락실 사업에 뛰어드는 추세다. 두목이었던 김태촌(58)씨의 갑작스러운 일본 출국으로 관심을 끈 '서방파'의 움직임이 돋보인다. 올 6월 '바다이야기' 업주를 폭행해 오락실을 빼앗은 범서방파 부두목 이모(47)씨가 구속됐고, 8월엔 서방파 행동대원 백모(32)씨가 성인 PC방을 운영하다 적발됐다. 특히 서방파 부두목 오모씨는 하루 평균 매출 1억~5억원의 불법 카지노바 2곳을 운영하며 경품용 상품권 발행업체에 투자해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는 사실이 최근 국정원과 경찰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서방파와 함께 강남 유흥가를 장악한 'OB파'의 부두목 출신 김모씨는 신사동~강남역 벨트의 성인오락실을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대로에서 성인오락실을 운영하는 장모(51)씨는 "목 좋은 곳에 성인오락실을 내려면 조폭을 안 거칠 수 없다. 조폭이 연관된 오락실의 반경 2㎞ 안에 가게를 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에선 성인오락실로 급성장한 신20세기파가 '영도파''유태파' 등과 연합해 전통의 강호 '칠성파'를 압박하고 있다. 올 1월 부산시 청룡동의 한 장례식장에서 조폭 수십 명이 패싸움을 벌여 52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칠성파가 뒤늦게 성인오락실 사업에 나서자 선발주자인 신20세기파가 칠성파를 공격한 것이었다.

◆ 조폭의 새로운 돈줄=성인오락실 사업은 조폭의 새로운 자금줄이 되고 있다. 조폭은 ▶갈취▶운영▶지분투자▶총판권 획득▶야식.음료수 납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오락실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성인오락실 업주들은 어쩔 수 없이 조폭과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조폭이 지역 내 오락기.상품권 유통에 깊숙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서울 영등포지역의 업주 유모(48)씨는 "조폭들이 돌리는 상품권만 취급해야지 다른 상품권을 들였다가는 당장 문을 닫아야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업주 최모(44)씨는 "처음엔 조폭들이 지분투자라며 억지로 돈을 빌려주고 이익의 상당 부분을 꼬박꼬박 챙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당국이 주목하고 있는 대목은 지분투자다. 조폭이 성인오락기 제조업체나 상품권 발행업체에 돈을 대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검.경은 서울 미아리에 근거를 둔 'S파'와 대전의 '반도파'가 성인오락기 사업에 투자를 한 정황을 포착했으며, 영광파.서방파.칠성파도 상품권 발행업체의 지분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경품용 상품권 업체 관계자는 "조폭과 연관돼 있는 상품권 총판으로부터 '20억원을 줄 테니 총판권을 넘겨라'는 압력을 받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 '조폭과의 전쟁'돌입=경찰청은 1일부터 두 달간 '조폭과의 전쟁'에 들어간다. 성인오락실과 연계된 조폭을 소탕하는 게 목적이다. 성인오락실로 얻은 불법 이익도 환수해 조폭의 자금줄을 말리겠다는 방침도 세웠다. 검찰.경찰은 전국 200여 개 파 5000여 명에 이르는 '조폭 리스트'를 만들어 동태를 파악 중이다.

이철재.정강현.김호정 기자<seajay@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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