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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 마지막황제「푸이」교화|김원 씨 46년만에 고국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중국 공견당 무순전범관리소 책임자로 있으면서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부의)를 교화, 「훌륭한 교사」로 존경을 받았던 중국교포 김원 씨(64)가29일 오후 46년만에 일시 귀국했다.
국내에도 상영된 영화『마지막 황제』에서 실제인물로서는 유일하게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경북봉화출신.
그는 5촌 조카인 김시동 씨(41·회사원·서울구수동81)등 친척들의 초청으로 44년 고교시절에 이어 두 번째로 부인 정영순 씨(62)와 함께 왔다.
『문화혁명의 절정기에 푸이 등 전범들을 너무 인도적으로 대했다고 군중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한때 숙청까지 당했지만 결코 후회는 없습니다. 황제가 저지른 잘못은 개인의 부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제도의 잘못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김씨는 푸이가 2차대전후 5년간 소련에 억류됐다가 50년 7월31일 신생 중공정권에 인도되면서 기구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3세 때 청나라 황제로 즉위했으나 중국근대화의 와중에서 오욕과 회한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푸이 못지 않게 김씨의 삶 또한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26년 경북 봉화 읍 농가에서 4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난 김씨는 6세 때 부모가 일제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만주로 이주, 이후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모의 높은 교육열덕분에 이삼점 소학교를 거쳐 조선족학교인 지지하루생립 제3국민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이어 46년3월 임표휘하의 동북 만주련 군에 전사로 입대했다.
이후 소대장·중대장까지 진급한 그는 50년7월 무순전범관리소가 생기면서 이곳으로 옮겨 일어통역을 맡았다.
그는 53년 부 과장,56년 정 과장, 58년 부 소장,60년 정 소장 등으로 승진하면서 74년 4월까지 24년간을 이곳에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일본전범, 만주국 황제·대신과 국민당 장성 4백 여명을 교화, 대부분 석방시키고 일부는 재판에 회부했다.
관리소 생활초기의 푸이는 철저한 무능력자였다.
소련 억류기간 중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냈던 그는 풀 뽑기 작업을 시키면 꽃만 골라 뽑는 등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인물의 전형이었고 그때마다 동료들의 원성과 불평을 샀다.
철저하게 고립되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던 푸이는 김씨에게 수시로 자신의 문제를 상의했고 그는 푸이를 인간적으로 감싸고 위로했다.
59년 중국건국 10주년특사로 석방되던 날 푸이는『죽을 목숨이 살았다』며 김씨에게 고마워했다.
푸이는 석방 후 북경 전인대상무위원으로 지내다 6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가 북경에 가면 용케도 알고 밤12시 넘어서도 찾아왔으며 평소에도 자주 편지를 보내왔습니다.67년 문혁의 와중에서 내가 군중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당했을 때는 신변위협을 무릅쓰고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김씨는 69년 일가족과 함께 농촌으로 추방되기도 했으나 2년 뒤인 71년 복권됐고 74년부터는 북경국제정치학교 정법대교수로 노동관계를 강의했다.
지난해 정년 퇴직한 김씨는 현재 정법대 명예교수로 있으며 전인대상무위원인 푸이의 동생 푸치에 와도 가까운 사이로 자주 만나고 있다.
김씨의 2남2녀 가운데 승리(41)·승광(35)씨 등 두 아들은 현재 일본의 일본학원과 천섭공대에 유학중이다.

<이하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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