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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산구좌 개인별 종합파악이 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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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올해는 헤쳐나갈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역시「금융실명제 준비」의 해다.
이제껏 시행된 숱한 정책중에 내년부터 시행될 금융실명제만큼 개혁적인 조치는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82년 거창하게「거명」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파동속에 「실명」 되었던 경험이 말해주듯, 실명제는 개혁적 이상이 높은 것 만큼이나 현실과 부닥치는 벽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정부가 지난해 4월 금융실명거래실시 준비단을 발족시키고 지금까지 때로는 야간작업까지 해가며 해온 일이란 것도 사실 실명제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의 목록을 금융· 증권· 세제·세정·전산등 주제별로 남김 없이 찾아내는 일 뿐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만큼 실명제의 예상되는 문제점들을 빼지 않고 찾아내는 일 자체가 방대하고 또 앞으로 남은 기간 민주적 합의 과정을 거쳐 해결해야할 문제도 과연 실명제의 이상과 현실사이의 어느 「경계선」 에서 실명제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면서 부작용을 최소화 시킬 수 있는 수단을 찾느냐 하는데 있다.
지금까지 논의된 실명제의「주제별 목록」 을 토대로 현재 실명제 추진이 어디까지가 있나를 알아본다.

<금용거래 실명화>
내년 1월1일 이후 새로 구좌를 트는 금융거래는 본인명의의 실명을 반드시 사용토록 의무화된다. 실명의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은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학생증등을 제시해 대조토록 한다.
문제는 기존의 비실명 거래인데 이들에게는 6개월∼1년의 유예기간을 주어 이기간안에 실명화하도록 할 것을 검토중이다.
내년부터는 실명제 실시가 이미 예고되었고 또 올하반기부터는 6개월간 예행연습도 하겠지만 그래도 일시에 비실명거래를 전면 금지하는데는 많은 불편과 무리가 따를 것이므로 결국 기존의 금융거래에 대해서는 91년6월30일까지 또는 12월31일까지의 비실명을 그대로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거래 완전 전산화>
실명제는 거래 단계에서의실명 확인뿐만 아니라 한사람이 여러 금융기관에 예금이나 주식등 갖가지 형태로 갖고 있는 금융자산을 인별로모아 종합 과세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전산망의 구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선 금융기관중 가장 전산화가 앞서가고 있다는 은행만 하더라도 기존 예금구좌의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대조해 서로 맞아 떨어지는지를 검색하는 능력조차 아직 완벽하지가 못하다. 더구나 한 사람이 같은 은행에 여러 구좌로 나누어 예금해 놓은 경우 이를 한데 모아 파악하는 체제도 일부 은행을 제외하고는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여러 은행에 나뉘어져 있는 구좌를 인별로 종합파악한다는 것은 현재의 은행전산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은행들로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구좌별금융자산자료를 그저 있는대로 모아 국세청에 넘겨주는 것인데, 이를받아 처리해야할 국세청전산실도 사정이 편치는 못하다.
지난해 6월 금융실명제실시 준비작업단 (단장 조원직세국장) 을 구성, 실무 작업을 해오고 있는 국세청이 현재보유하고 있는 전산시설은 ▲대형 컴퓨터 6대 ▲입력장치3백76대 ▲단말기 4백22대등이다.
이같은 시설을 가지고 국세청은 연간 약1억4천만건의 세무자료를 처리하고 있으나 실명제가 실시 되려면 금융자산의 인별관리를 위한소프트웨어의 개발은 물론 당장 폭주하는 자료 처리를 위해 전산시설의 확충이 시급하다.
또 은행이나 국세청은 그렇다치고 지방 농수축협의 단위조합등 영세한 규모의 금융기관까지 실명제 실시시기에 맞춰 일시에 전산망을 갖춘다는 것은 힘들고, 이들 기관들에서는 당분간 수작업을 범행해야할 것으로 실명제준비단은 보고있 다.

<자산소득 종합과세>
모든 금융자산소득을 종합과세 하지는 않는다. 얼마되지도 않는 소득을 종합과세 한다고 하여 쓸데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불편을 즐 필요가 없고, 또 그같은 소액자산소득까지 모두 관리할 세무관서의 행정능력도 부족하다.
또 이자나 배당소득은 과세하기가 쉬워도 주식매매차익에 대해 과세한다는 것은외국의 예에서 보듯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현재까지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 바로는 ▲이자나 배당소득은 연간 일정금액 이상만 종합과세하고 ▲주식매매차익에 대해서는 시황을 보아가며 단계적으로 과세를 확대해 나간다는 원칙만 서 있을 뿐 더이상 구체적인 기준은 마련된 것이 없다.
이자나 배당소득의 과세기준은 현재 국세청이 작성중인 소득분포자료가 완성되는 대로 이를 근거로 공청회등을 거쳐 정하면 되지만 문제는 주식매매차익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미국은 투자자 본인이 과세기간중의 이익과 손실을 세무서에 신고해서 세금을 내고 수상쩍다 싶으면 세무조사가 실시되며 ▲대만은 매매차익 산출이 어렵다 하여 거래금액을 기준으로 연간 3백만 NT달러 이상의 주식거래에 대해세금을 매기기 시작하다가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가 일어나 연간 1천만 NT달러 이상으로 과세기준 거래금액을 올려 주식시장의 안정을 되찾은 경험이 있다.
일본은 지난해 4욀부터서야 비로소 제도를 마련, 투자자가 ▲미국처럼 신고해서 26%의 세율로 별도분리과세를 받든가 (종합과세가 아님) ▲아니면 증권거래세처럼 매번매도금액의 1%씩을 내도록 했는데, 투자자의 90%이상이 후자의 납세방법을 택할 예상이라고 한다.
현재 정부는 미·일·대만식의 장단점을 비교해가며 우리 실정에 더 적합한 방식을 찾고있는 중이다.
한편 일정금액이상의 소득이 종합과세 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납세풍토상 미국처럼 연말에 몰아서 한번에 과세하는것은 힘들고, 현재의 근로소득세 징수방법처럼 매번 이자지급 때나 배당지급 때 일단원천징수를 하고 연말에 가서 다시 정산하는 형태를 정부는 구상하고 있다.
종합과세기준 이하의 소득자들은 원천분리과세만으로 세무서와의 일은 모두 끝나지만 본인이 원하면 종합소득신고를 통해 정산을 할 수 있도록할 방침이다.
종합소득세율이 분리과세율보다는 낮을 것이므로 정산을 해서 다소라도 세금을 돌려 받을 수 있는 경우가 생길수 있기 때문이다.

<경과 조치>
실명제 보완책 마련의 가장 예민한 부분중의 하나다.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주식·예금등의 임자들이 하나씩 드러날 경우 현행법대로라면 국세청이 일일이 자금출처조사를 통해 상속세·증여세등을매겨야한다.
또 주식소유상황이 정직하게 드러나면 증관위 규정에 따라 제재나 고발을 당해야 하는데 대주주도 많을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상장종목에서 탈락하여 선의의 일반투자자들에게 보상받을 길이 없는 피해를 주는 기업도 있을수 있다.
쉽게 말해 비실명제하에서의「과거」를 실명제하에서 어디까지 물을 것이냐하는 심각한 질문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탈세나 주식위장소유를 엄히 묻자니 자본의 대규모 해외도피나 금융시장의 충격이 걱정되고, 재무부가 연초 업무보고에서 밝힌대로 이들을 실명제안으로 곱게 끌어들이기 위해 「구제책」을 마련하자니 사회정의에 어굿나는일을 정부 스스로가 행하는 모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과거 8·3조치나 지난82년의 사채자금양성화조치 때처럼 미성년자의 일정금액이상에 대한 자금출처조사등 거의 있으나 마나한 예외만을 두고 제도금융권으로 들어오는 실명자산은 모두 자금출처를 불문에 부친다는 경과조치도 일단 거론은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경우 차제에 합법적으로 세금을 전혀 물지 않고 기업의 부를 대물림하는 사태가 또다시 일어나게 되므로 정부안에서도 강력한 반대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이 문제도 현재까지 결론이난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전환세」와 같은 과도기적인 특별세를 한시적으로 만들어 걱정한 수준의 세금을 내고 실명화되는 자산에 대해서는 자금출처를 불문에 부치고 ▲대주주지분 소유한도를초과하는 주식은 일정한 처분기간을 인정해주는 방안등이 검토되고 있다.

<자기앞 수표>
자기앞수표는 사실 금융자산에 대한 종합과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별단예금에서 자기앞수표를 끊거나 현금을 수표로 바꾸거나 아무런 이자소득이 생기지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기앞수표가 예민한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것은 현금과 똑같으면서도 큰 돈뭉치를 종이 한장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기앞수표의 편리성이 음성거래 여지를 줄이기 위한 실명제의 큰「구멍」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장기적으로 자기앞수표의 사용을 줄여나가기 위해 ▲가계수표· 당좌수표· 신용카드· 자동계좌이체· 지로 (GIRO) 의 이용을 확대하고 공사입찰보증금을 예금증서로 대신케 하는등의 조치이외에 ▲내년부터 자기앞수표를 끊어 가거나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때 반드시 본인의 실명을 확인토록 하는 방법도 검토중이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다. 과세와 관계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어차피 노출을 꺼리는 거래를 건드려 공연히 현찰수요만 크게 늘려 놓으면 은행예금은 줄고 한은의 현금통화 발행량만 늘려놓을 뿐이라는 것이다.

<비밀보장 문제>
금융거래전산자료가 과세목적 이의에 정치탄압등에 이용되는 것을 막기위해 비밀보장은 실명제가 반드시 걸어야 하는「안전장치」다.
이를 위해 정부는 올해중 법을 고쳐 법관의 영장 없이는 자료제공을 금지시키는등 비밀보장조항을 대폭 강화할 방침이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은 비밀보장이 종종 법이전의 문제였다는 인식을 뿌리깊이 심어 놓았으므로 법을 고친다 하더라도 이 문제는 상당기간 실명제 안착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자본 해외도피>
사실은 지금까지 거론된 모든 문제들을 잘 해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해외 도피방지책이다.
이외에 더 생각할수 있는 것은 ▲세제개편을 통해 우리의 세율이 외국보다 불리하지 않도록 하고 ▲건강한 경제체질을 유지해 투자수익률이 외국보다 높은 경제를 꾸러가는 길이다.
해외송금 때 거래은행을 지정토록해 한은이 이를 종합관리하겠다지만 현재의 은행전산능력으로는 아직 시간이필요한 얘기고 경제의 개방화가 가속적으로 진행되는 마당에 기업의 경상거래를 통한 자본도피는 거의 잡아 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김수길·박의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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