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 합격자 학부모의 도움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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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해 전기 대 입시에서 딸애가 낙방했을 때 하늘이 온통 노랗게 보였다. 땅이 꺼지는 듯한 허탈감,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분노….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절대 모를 것이다.
더구나 딸애가 응시한 E여대 전산과는 안전위주로 제 실력보다 크게 낮춰 지원한 학과가 아니었던가. 도대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그러나 딸애가 받은 충격과 고통은 나보다 훨씬 더했던 모양이다. 그 티 없이 맑고 밝은 애가 가족마저 피해 방에서 혼자 우는가 하면 밤에도 얼굴을 찡그린 채 잠을 잤다.
내 감정을 빨리 추스르고 딸애를 다독거려야 했다. 『1년 더 공부해 보겠다』는 딸애의 말에서 확고한 의지를 확인하고는『그래, 정성을 모아 1년 더 해보자』고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다행히 애 아버지가 「재수 기념」이라며 전축을 사주고 용돈도 주는 등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고 여기에 힘을 얻은 나도 일체의 꾸지람이나 과잉 친절을 베풀지 않고 고3시절과 똑같이 예사롭게 딸애를 대했다.
재수기간동안 딸애는 다소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강박감으로 인해 약간의 불안증을 보였다.
나로서는 딸애가 평소 독실했던 신앙심을 계속 유지하도록 앞장서 교회에 데리고 나가는 한편 자연스럽게 대화의 기회를 마련, 속에 있는 말을 마음껏 털어놓도록 하는 것 외에 이렇다싶게 해준 것은 없다. 그러나 딸애는 나중에 이것이 많은 심적 위안 감을 줬다고 했다.
가끔 성적이 떨어질 때면 딸애는 크게 당황,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공부에만 매달려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다. 그때는「생활을 위한 공부」가 되어야지「공부를 위한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딸애는 노력한 보람이 있어 결국 올해 S대농가정학과에 무난히 합격했다.
사실 재수는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본인의 확고부동한 결심과 가족 등 주변의 따뜻한 뒷바라지가 있어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며 「남들이 다하니까 따라 한다」는 식으로 재수에 뛰어 들어서는 숱한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최유림씨(47·화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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