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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하면 높은 자리 '예시 기능' 코드 맞으면 낙하산 '연타 기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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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할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다는데 괜히 허깨비 역할만 하는 게 아닌지…."

8월 2일 열린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심사위원회에 참석했던 위원 Q씨는 처음부터 마음이 무거웠다고 말했다.

이재용 전 환경부 장관이 내정됐다는 소문이 몇 달 전부터 파다하게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장인 조재국 보건사회연구원 실장은 이날 면접을 보러 온 이 전 장관에게 "국민 건강을 위해 매우 중요한 자리다. 이사장 자리를 정치적 징검다리로 사용하지 말라"는 충고도 했다. 이런 심사 과정을 거쳐 이 전 장관이 23일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에 공식 임명됐다.

5.31 지방선거에서 대구 시장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지 석 달 만이다. 출마→낙선→요직 발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낙선했을 때도 이듬해 바로 환경부 장관에 임명됐다. 열린우리당의 열세 지역인 대구에 출마하는 대가로 미리 자리를 약속받았다는 의혹은 그래서 나온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내정해 놓고 들러리를 세우는 양두구육(羊頭狗肉) 인사"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 이사장은 '깡'이 있다. 건보공단의 현안 처리에는 소신과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파행 공모=건보공단 전임 이사장은 이성재씨였다. 그의 임기는 6월까지였지만 내심 연임을 노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복지부는 5월 건보공단이 예산을 방만하게 쓴다는 감사 결과를 내놓았다. 건보공단 노조는 "감사는 현 이사장 흠집 내기이자 공단 길들이기"라고 주장했다. 엄성호 건보공단 이사(전국농민단체협의회장)는 "이성재 이사장을 내몰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뒤 공석이 된 자리를 놓고 이재용 전 장관 내정설이 퍼졌다. 공모는 모양이 우습게 됐다. 이재용씨와 건보공단 간부 등 두 명만 응모했기 때문이다. 노조는"들러리 응모"라고 비판했다. 추천위 1차 회의에선 "두 명만 놓고 심사하면 웃음거리가 된다"는 말도 나왔다. 결국 1주일간 추가 공모를 했고, 공단의 직원 한 명이 추가됐다. 한 심사위원은 "전문성을 갖췄고, 이사장 공모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포기하더라"며 "대통령이 아끼는 사람이 내정됐다는데 누가 나서겠느냐"고 말했다.

건보공단 이사장은 1만여 명의 직원과 24조여원의 예산을 관장한다. 국민이 아플 때를 대비해 낸 건강보험료를 관리하는 자리다. 새 약값 제도 안착, 4대 사회보험 징수체계 통합 등 해야 할 일도 산더미다. 이재용 신임 이사장은 치과의사 출신이라는 점 외에는 건강.의료 정책 분야를 다룬 경험이 없다. 그나마 95년부터는 구청장에 출마해 사실상 정치인의 길을 걸어왔다. 심사위원이었던 장대익 한국노총 부위원장은 "면접 시간이 짧아 (후보자의) 전문성을 파헤친다는 건 어려웠다"고 말했다.

유석춘 연세대 교수는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타락한 코드 인사이자 보은 인사의 결정판"이라고 말했다.

◆ 환경.보건 모두 전문가? =청와대 정태호 대변인은 "치과의사로 병원을 운영한 경험이 있고,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전문성이 있다"고 말했다.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분이 가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며 임명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2005년 6월 이씨를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할 때는 그를 "환경분야 전문가"로 설명했다. 건강보험 노조 관계자는 "앞으로 신임 이사장의 개혁 의지와 업무 능력을 예의 주시할 것"이라며 "경우에 따라 출근 저지 투쟁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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