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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칼럼

청와대에 유머비서관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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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84년 미국 대선에서 먼데일 후보는 경쟁자인 레이건 대통령의 고령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TV토론에서 먼데일이 물었다. "대통령의 나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레이건은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득의만면한 먼데일이 "무슨 뜻이냐"고 되묻자 레이건은 미소 지었다.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미국 전체가 웃음바다가 됐고 먼데일은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케네디는 반대의 경우다. 43세의 케네디가 대선 후보로 나섰을 때 경쟁 상대인 닉슨 부통령은 그를 "경험 없는 애송이(naive and immature)"로 몰아세웠다. 사실 케네디는 닉슨과 같은 해에 의회에 입성해 정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금주 톱뉴스는 야구왕 테드 윌리엄스가 나이 들어 은퇴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경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말해 주는 예지요." 결과는 애송이의 승리였다.

두 사례는 유머가 강력한 무기임을 입증한다. 정반대 상황에서 모두 유머로 극적 반전을 이뤄낸 것이다. 상대의 공세를 맞받아치는 데 거품을 물었다면 그만한 효과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장황한 해명보다 한마디 유머가 더 큰 설득력과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고수 정치를 보다 우리 현실로 돌아오면 이내 짜증이 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입만 열면 험담이고 욕설이다. 분노와 반감이 뚝뚝 떨어지는 섬뜩한 표현들이 난무한다. 대통령의 정제되지 않은 직설화법은 이미 고유상표가 됐다. 주변 사람들 입은 더욱 거칠다. "배 째라고요? 그럼 째 드리죠"라는 말이 조직폭력배 은신처가 아니라 국정의 중심 청와대에서 흘러나왔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국가 안위를 걱정해 거리에 나선 원로들에게 "쪽 팔리게 그러지 말고 집에 계시라"고 쏘아붙이고,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에는 "내 손 안에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약탈 정치'니 '계륵'이니 자극적 표현을 하는 일부 언론도 지나친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언론을 '마약'에 비유하는 축도 나무랄 자격이 없다.

우리는 품격 있는 유머 정치가 불가능할까. 유교적 엄숙주의 탓이라고? 천만에. 조상의 해학은 분명 지금 우리보다 몇 수 위였다. 세조를 보자. 세조는 구치관(具致寬)을 새 정승에 임명했다. 그는 전임자인 신숙주(申叔舟)와 불편한 사이였다. 세조는 두 사람을 불러 놓고 물음에 틀리게 답하면 벌주를 내리겠다고 말했다. "신 정승!" 신숙주가 대답하자 왕이 나무랐다.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소? 신(新) 정승을 불렀지. 자, 벌주!" "구 정승!" 구치관이 대답하자 세조 왈. "구(具) 정승 말고 구(舊) 정승 말이오. 벌주!" "신 정승!" 이번엔 구치관이 대답했다. "또 틀렸군. 이번엔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두 사람은 도무지 벌주를 피할 수 없었다. 임금 앞에서 대취했고 자연스레 화해를 이뤘다. 세조가 권위를 내세워 강요했다면 진정한 화해가 가능했을까.

정치 지도자들은 자리가 자리니만큼 흔히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때로는 근거 없는 음해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 거친 말을 내뱉어 국민을 불안하게 하지 않고 유머로서 긴장을 풀고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능력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쉽지 않다면 청와대에 유머 비서관을 두면 어떨까. 스스로 존재가치를 모르는 듯한 홍보비서관들을 대신하면 증원 없이도 가능할 법하다. 서양 정치인이라고 다 선천적 유머 감각의 소유자들일까. 대부분 비서관들이 고민해 갈고 닦은 유머였고 피나는 노력으로 체득한 것일 터다.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수상 소감으로 "나를 키운 것은 유머였고 내 최고의 능력은 조크"라고 말했다. 유머가 창조적 아이디어의 원천이라는 얘기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재치 있는 유머로 상황을 반전시키고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고품격 정치인들을 보고 싶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