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한「대 타협」이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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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한해가 또 저문다. 89년도 이제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 남은 날이 80년대의 길고도 험난했던 10년을 마감하는 문턱 앞에서 있다.
마지막 남은 3일. 예년 같지 않다. 예년같을 수 없다. 수많은 젊음의 희생이 굴절되고 「지역과 민주」를 갈라놓은 5공 문제가「연내 청산」마무리에 마주쳤기 때문이다.
5공 청산의 대 타협안 중 핵심인 전두환 전대통령의 국회 증언이 31일 이뤄지고 정호용 의원의 공직사퇴도 오늘 내일사이 발표될 것이 확실시 돼 더욱 그렇다.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굽이에서 많은 국민들은 긴장과 기대가 교차되고 모두에게 잠시나마 겨울하늘을 우러러 보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위정자나, 권력에서 물러난 자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억누른 자나 억눌림을 당한 자나, 그리고 광주 희생자와 시민들도 말이다.
긴세월 동안 가슴에 박힌 못 자국을 더듬으며 회한·오욕·원한·분노·아픔과 소스라침이 무겁게「남은 3일」로 응집하며 역사의 주시 앞에 다가서게 한다.
그래서 역사의 심판이 어떻게 골 깊은 상처와 잃어버린 삶의 발걸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진실을 밝혀낼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인지에 대해 술렁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나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정치 놀이」나 아직도 국민을 의식하지 못하는 위정자들의 착각이 없지 않나 하는 점이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자연의 섭리인줄 알아야 한다. 국민의 이같은 시선이「마감의 문턱」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국민을 또다시 우습게 여기는 5공 놀이식이 되고 만다.
1980년 정권의 첫 과오는 그해 4월 무턱 댄 공권력 투입으로 빚은「사북 사태」다. 그리고 시나리오의「5·7계엄」과 「5·18광주항쟁」으로 이어진 80년의 봄과 대 숙청·강제해직의 여름. 총부리가 절대 권력을 만들었고「체육관 선거」의 대통령이 군림했다.
국민들의 민주열망을 송두리째 짓밟은 권력은 양심인을 죄인으로 내몰았고 원고지에 수갑을 채웠다. 그 권력과 권좌의 인물들.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들을 10년만에 심판대위에 올려놓는 정의를 내렸다.
국민의 관심은 31일 전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에 쏠리고 있다. 얼마만큼 진실되고 사죄하는가다. 이는 곧 헤아릴 수 없이 막혔던 갈래의 물줄기가「대 타협이라는 장」으로 합쳐 대하를 이룰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대 타협은 위정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국민의 합의」여야 한다.
국민은 강요의 침묵을 거부한다. 권력에 빌붙거나 권력이 두려워 침묵을 지켜온 지식인·중산층도 더 이상 자신을 포기하고 잃어버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국민의 권리이며 의무인 까닭에서다.
5공 세력이 비록 권좌와 권력에서 물러났을지언정 아직도 보이지 않은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많은 국민들은 알고 있다. 국민들의 이같은 인식은 5공 청산의 핵심인 국회증언이 회기에 쫓겨 알찬 심의를 못한채 통과시킨 새해 예산안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맞닥뜨
린다.
하필 국화증언 일자를 올해와 80년대의 마지막 날인 12월31일로 잡아 의구심을 사게 하는지 모르겠다. 대 타협의 핵심문제를「연내 청산」이라는 명분에만 두고『어떻게든 때웠지 않았느냐』는 식이 되지 않기 바란다. 대 타협은 떳떳하고 공감돼야 한다. 눈가림이나 말로만 그치는 형식에 치우쳐 슬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모든 국민의 공통된 기대이며 피할 수 없는 과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최규하 전 대통령의 증언출석 거부는 5공문제의 연내청산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뿐만 아니라 국민에 대한 기만이며 그 자신에게도 슬픈 일이다. 전직 대통령이란 직함을 국민 앞에 내놓는 일이 있어도 국민의 한사람이기 때문에 과거 허물을 벗어야할 책임이 있다.
저무는 기사년. 5공 청산이 굴절되지 않고 국민적 공감속에 한의 80년대를 풀어 경오년 새해를 맞도록 하자. 이정춘<태백도서관장·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4동 15통2반 가능 연립다동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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