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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종원<영화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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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80년대 한국영화는 소재 개방이 뜻하는 전향적인 흐름과 수입개방이 가져온 역기능으로 1보 전진 후 2보 후퇴하는 영욕의 파란을 겪었다. 82년 야간통금해제와 함께 개설된 심야극장은 성애영화의 범람을 예고했고, 이에 자극 받아 만든『애마부인』(32만 관객동원)의 히트는 에로티시즘을 표방하는 벗기기 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에 개봉돼 성애영화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 외화『보디히트』와『우편 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 그리고 우리영화『탄야』『반노』『밤의 천국』『산딸기』등이 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외설성 관능영화의 성행은 바로 굳게 다져졌던 장미희(세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유지인(피막), 정윤희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등 트로이카를 붕괴시키면서 원미경(외인들), 안소영(애마부인), 나영희(어둠의 자식들)등 새 얼굴들을 떠오르게 했다.
이런 가운데 우리영화는 임권택(만다라·80년), 이두용(피막·80년)의 거듭남과 이장호 (바람불어 좋은 날)의 성공적인 재기로 국제화시대를 향한 도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더욱이『꼬방동네 사람들』(82년)을 데뷔작으로 들고 나온 배창호의 가세는 시계가 흐려있던 한국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또한 8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장길수(밤의 열기 속으로), 곽지균(겨울 나그네 ), 신승수(장사의 꿈), 박광수(칠수와 만수), 박종원(구로 아리랑), 배용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등 이른바 학구적인 제5세대 감독들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80년대 초 5공 치하의 한국 영화는 허가제라는 악성 영화법으로 제작의 자유는 물론 표현의 제약으로 70년대 유신체제 때와 다름없는「의식의 공동현상」을 초래했다. 이런 시기에 빚어진『도시로 간 처녀』의 제작중단(인권침해)과『비구니』의 제작포기(외설시비)파동은 한국영화가 당면한 표현의 한계를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 표현의 자유와 제작 자율화를 골자로 한 영화법 개정의 요구였다. 확산된 영화법 개정운동은 새 영화법이 시행(87년1월)됨으로써 잠재워졌지만 민주화 선언(6월)에 이은 수입개방 정책으로 영화계는 또 한차례 진통을 겪어야 했다.
제작의 자율화는 영화법 개정 전까지 불과 20개 사에 지나지 않았던 영화 회사를 1백20여개 사로 양산하는 과열현상을 빚은 반면, 수입개방은 가뜩이나 취약한 한국 영화시장을 위협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신축성을 갖게된 소재와 영화검열의 완화는 젊은 영화인들의 의욕을 북돋우면서 한동안 금기시 돼 온 사회모순·정치비리·이념의 갈등을 그린 고발성 리얼리즘영화가 설 땅을 마련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 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칠수와 만수』『구로 아리랑』『서울 무지개』(김호선 감독)등이며 촬영중인『남부군』(정지영 감독)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아픔과 시대적 갈등이 표출된 리얼리즘영화의 대두는 그동안 정책적인 비호를 받아 온 도식적인 계몽물 및 반공영화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러나 민주화의 물결은 UIP영화 직배라는 부정적인 장애요인만을 제공한게 아니었다. 북방정책에 힘입어 엄두조차 못 냈던 공산권 국가의 영화, 이를테면『전쟁과 평화』『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이상 소련),『아빠는 출장 중』 (유고),『부용진』『붉은 수수밭』(이상 중국)등의 소개와 함께 수입이 금지됐던『Z』『로메로』와 같은 군사정권의 폭력을 담은 작품들이 공개돼 미국의 오락영화 중심인 국내시장을 다변화시킴으로써 영화선택의 폭을 넓혔다.
80년대 한국영화는 역사적인 정치·사회의 격변 속에 굴절되는 가운데서도 획기적인 수확을 거두었다. 이두용 감독의『피막』(81년 베네치아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임권택의『길소뜸』(86년 시카고영화제 세계 평화 메달상), 배창호의『깊고 푸른 밤』(제30회 아시아-태 평양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이장호의『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제2회 동경 국제영화제 비평가 협회상) 등이 국제적인 평가를 받은데 이어 강수연이 제44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씨받이)와 제16회 모스크바영화제(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각각 여우주연상을,『아다다』의 신혜수가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한국영화 70년을 맞이한 89년의 시점에서 르네 클레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등 세계적인 감독을 배출한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에서 배용균 감독의『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 그랑프리(황금 표범상)를 획득한 것은 희망을 주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80년대 한국 영화는 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격동과 변혁의 시기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은 전환의 고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미약했던 비평의 활성화는 특기할만한 일이다. 대부분의 매스컴이 굳게 닫혔던 지면의 빗장을 열고 비평가들에게 발표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가운데 안성기를 비롯한 이영하 박중훈 이미숙 이보희 이혜영 등 연기자들의 의욕적인 활동이 돋보였고, 박철수 송영수 감독의 잠재력 또한 주목을 끌었다.
80년대 한국영화가 거둔 또 하나의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분단상황의 극복과 민족 동질성 회복이라는 과제에 비로소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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