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에가 오갈 데 없어 앞날 "미로"|바티칸, 신병처리 놓고 고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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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로마교황청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요구하며 피신한 파나마군사독재자 노리에가의 처리문제로 관계당사국들이 외교적·법적 딜레마에 빠져있다.
24일 그의 피신을 받아들인 바티칸측은 현재 「이해 당사국들」과 상의하겠다는 입장만을 밝히고 있고 부시 미 행정부는 해결방안을 검토중이라고 하지만 그 선택 폭은 매우 좁은 것 같다.
교황청 대변인은 노리에가가 현재 파나마시티의 교황청대사관 구내에 들어와 있긴 하나 그에게 아직 정치적 망명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밝혔고 파나마주재교황청대사인 세바스티엔 라보아 신부는 노리에가를 미국이나 파나마정부에 인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황청대사관에는 노리에가뿐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장교 및 정치인 32명도 포함돼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리에가 측으로서는 교황청대사관을 택한 것이 일단 현명한 결정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우선 2만여 미군의 급박한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1개국 이상의 행선지를 놓고 흥정할 수 있는 입장까지 확보한 셈이다.
미국은 비록 노리에가를 수중에 넣지 못했지만 그의 바티칸대사관 피신에 대해 당장은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다. 훌륭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표현까지 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의 행방이 파악되고 더구나 거세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 정부가 공표 해온 노리에가 처리방안은 마약거래혐의로 미 법정에 기소된 그를 재판에 회부하는 일이다. 문제는 교황청대사관이 그를 어디로 보낼 것이냐는 데 있다.
노리에가 자신은 제3국 망명을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60년대 말 헝가리의 요셉 민센티호주교가 주 부다페스트 미국대사관에 15년간 피신했다가 서방으로 망명했고 중국의 반체제인사 팡리즈(방려지)가 지난 6월 이후 북경주재 미대사관에 머물고있지만 노리에가는 현 피신처의 장기체류를 희망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바티칸이 그를 제3국으로 보낼 것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가 될 것인지는 그 제3국이 미국과 어떤 관계인지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만약 미국과 범인 인도협정을 맺은 나라라면 노리에가가 선뜻 선택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미국이 노리에가를 기소한 후 파나마측과 막후 정치적 해결방안으로 그의 제3국 망명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스페인이 망명처 제공의사를 밝힌바 있지만 지금은 사절자세다.
설사 받아들이겠다 하더라도 스페인은 미국과 범인인도협정을 맺고 있어 그가 선뜻 그곳으로 향할 것 같지는 않다. 맹렬한 반미국가인 쿠바도 유력한 행선지로 거론되고 있지만 미국이 바티칸에 대해 외교적 저지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노리에가가 파나마의 신정부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상황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전문가들은 상상한다.
엔다라 파나마 신임대통령은 노리에가의 신병을 확보할 경우 미국에 그를 인도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미국과 범인 인도협정이 없어 인도의무가 없을 뿐 아니라 파나마헌법이자 국민의 대외인도를 금지하고 있어 엔다라가 그럴 의사가 있더라도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미 언론에는 심지어 노리에가가 스스로 미 재판에 응하는 가상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는 미국이 99년 파나마에 넘겨주게 돼 있는 파나마운하를 소유하기 위해 자신에 대한 복수극을 조작하고 있다고 주장, 무죄임을 계속 천명해온 점을 이 같은 가상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노리에가의 문명은 현재로서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막상 미국이 노리에가의 신병을 인도한다 하더라도 그의 법적처리에는 많은 난점이 예상되고있다.
우선 그에 대한 기소 자체가 면밀한 수사결과 보다는 주로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법무부는 충분한 증거를 갖추고 있다고 장담하지만 검찰 측 입장이 약하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미정부가 그가 망명을 택하는 경우 소취하를 검토하는 방안을 노리에가측과 논의했다는 사실이 이 같은 지적을 보강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정치적 파급효과가 더 큰 우려 사항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가 대미관계 악화 전에는 미 정보공작의 협력관계자였다는 사실에서 심각한 정치문제들이 파생되기 때문이다.
부시대통령도 70년대 중반 중앙정보국(CIA)국장시절 노리에가와 만난 일이 있는 것으로 알러졌다.
노리에가가 법정에 서게되면 미 정보관계자들과의 관계를 털어놓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변호를 위해 미 정보기밀자료의 공개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 행정부관계자 ,심지어 부시까지도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소지가 노리에가의 법적 처리과정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재판이 실현되더라도 수개월 또는 수년간 지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워싱턴=한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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