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이웃 돌보는 세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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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모가 가까워 올수록 내려가는 기온과 관계없이 열기를 뿜으며 흥청거리는 곳이 거리요, 백화점이다. 이와 반대로 실제 기온 이하로 썰렁한 냉기를 느끼는 곳도 있다. 밖이 축제분위기로 들뜰수록 마음과 몸이 더욱 한기를 느끼는 불우한 이웃들이 아직도 우리 주변엔 적지 않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가두에서 종을 울리기 시작했고, 학생이나 종교단체의 모금함이 거리와 전철 안을 누비고 있지만 시민들의 호응은 신통치 않다고 들린다. 특히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에 쏠리던 온정의 손길이 올해엔 유난히도 냉담하다고 한다.
이대로 간다면 세모의 위로잔치는 커녕 한겨울 난방비마저 줄여야할 처지라고 한결같이 걱정들이다.
과소비에 향락·퇴폐풍조가 사회문제화 되고, 망년회다 연휴다 해서 호텔이나 고급음식점이 복도까지 붐비며, 휴양지가 초만원을 이루는 마당에 이와 반비례로 불우이웃에 대한 온정은 해가 거듭될 수록 줄어만가는 풍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의도적 무시나 외면보다는 무관심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기주의적 자기만족 추구이거나 자기 주변사람들에 집착한 나머지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은 무디어진 것이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도울 것이라는 막연한 의뢰심과 책임회피, 하찮은 선행으로 나를 내세워야 하는 계면쩍고 쑥스러움 따위의 복합적인 심리적 갈등이 행동을 주저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우한 이웃들의 참담한 현실에 비하면 이런 비유나 핑계들이 얼마나 사치스런 감정의 희롱인가.
특히 6공화국 들어 불우이웃 돕기 온정이 식어 가는 것은 권력의 타율적 지시가 사라졌기 때문이며 경제침체에 의한 기업사정의 악화를 지적하기도 한다. 자발적인 행동, 자신의 씀씀이를 쪼개고 줄여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는 마음이야말로 참다운 온정의 발휘가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불행한 이웃의 존재를 분배의 불균형을 초래한 우리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 탓으로 돌리고 근본적인 해결만을 촉구하며 스스로는 외면한다. 그러나 가서 편히 쉴 방 한칸 없고 의지할 피붙이 하나 없이 각박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우리주변에서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선 그들에게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이웃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것이 구조적인 해결 보다 더욱 시급한 것이다. 극히 작고 하찮은 정성이나마 모이면 십시일반의 결과를 안겨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말고도 도시의 지하도나 육교 위에서, 시장 바닥에서, 길거리에서 우리는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불행한 이웃들을 흔히 만난다.
이러한 불행한 사람들이 외면 당하는 사회는 평균소득이 높아간다고 해도 결코 안정될 수도 없고 성숙된 사회라고 부를 수도 없다.
이들의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고 녹여주는 우리 모두의 정성은 우선 당장 발휘돼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시적이 아닌 항구적이고 제도적인 대책으로 확대돼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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