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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우울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가정주부 박모씨(32)는 2∼3개월전부터 식욕이 떨어지고 소화도 안되는것 같아 내과를 방문했으나 진찰과 몇가지 검사를 마친 의사의 말은 신경성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 몸무게가 줄고 잠들기가 힘들며 일찍 깨어나고 아침에 일어나도 기분이 상쾌하지않았다. 월경도 고르지 않아 산부인과를 찾았으나 특별한 이상이 없고 역시 신경성같다며 신경정신과의 진찰을 받는게 좋다는 담당의사의 충고에 따라 필자를 만나게 됐다.
면담중 최근 생활의 변화가 없었는 지로 화제가 바뀌자 박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조그만(?) 사건을 털어 놓았다.
남편 몰래 아낀 돈으로 계를 들었고 계를 타자 평소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급히 꿔달라는 바람에 믿고 주었는데 그만 그 친구가 일이 잘 안된다며 차일피일 미루고 돈을 안주고 있다는 것이다.
박씨는 『믿었던 친구가 그럴수 있느냐』고 하소연했고, 평소 잘해주는 남편에게 죄를 짓는 것같다고도 했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 즉 사람·물건·애완동물·명예·체면등을 잃었을때 우울증을 경험한다.
우울증은 정상에 가까운 정도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정도까지 경우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증상 또한 일정치않다. 하지만 대개는 우울감·의욕상실·죄책감·건강염려·자기비하등의 정서적 장애를 갖는다.
그러나 박씨처럼 신체적 불편이 두드러져 진단과 치료를 늦추게 하는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를 「가면성 우울」이라고 하는데 우울감·죄책감등이 신체증상으로 가려져 있다는 뜻이다.
필자는 남편에게 있는 그대로 얘기하도록 하고 한번쯤 야단맞을 각오를 하도록 조언했다. 나쁜 짓에 쓰려고 돈을 모은 건 아니나 돈을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 옳지 않은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돈을 빌려주어 문제가 되는 경우를 정신과 진찰실에서 자주 보게 된다는 사실도 알려줘 같은 생활사건이 다시 없도록 했으며, 귀찮은 주문일지도 모르나 아침에 가벼운 운동을 하도록 권유했다.
기분이 저하되면 주위에 대해 부정적이고 어둡게 느낄수 있음을 미리 경고하여 가급적 긍정적 시각으로 사물을 보도록 유도했으며, 우선 소량의 항우울제를 처방해서 식욕이나 불면의 조절을 시도했다.
같이 온 남편에게는 무조건 『그까짓것 갖고 뭘 그래』라는 태도보다 자연스럽게 지겨보는 자세를 취하도록 했다. 그까짓것 갖고 바보스런게 신경병에 걸리는 자신을 혹시 비하시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박씨는 1주일에 한번씩 방문해 면담도 하고 약도 써 2개월후에는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필자약력 ▲경기도 평택출생(45년) ▲서울대의대 졸업 (70년·의박81년) ▲고려병원 신경정신과 부과장 (78∼82년) ▲국립의료원 정신과장(82년∼현재)▲현 한국정신분석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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