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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우적이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편집위원이 된 것은 알았지만 나도 그의 소개로 해방일보에 들어갈 줄은 전혀 생각 못했던 일이다. 당초 나는 진주에 돌아가서 팔월회를 확대 강화해 정당을 만들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우락이 진주와 산청지방을 맡아 지방조직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46년에는 새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총선거가 있으리라 믿었다.
이우락은 진주고보밖에 나오지 않았어도 사람됨이 침착하며 조직력이 뛰어나 나는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서부경남, 즉 진주시·진양·산청·함양·거창·합천·의령·고성·사천·하동·남해 등 1시10군에는 나의 친지들이 많이 있어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이우적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우적은 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음!』하며 입을 다물고 한참 생각한 후 『2, 3일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 이튿날 밤 이우적은 『여러가지 알아봤는데 우리가 지금 서부경남을 중심으로 공산당과 달리 정당을 조직해봤자 전국적 정당으로 발전하기는 어렵다』고 반대의견을 말했다. 그는 『지금 공산당이 전국적으로 지방당 부조직에 착수하고 있어 이우락도 결국 산청군 당책밖에는 임명되지 않는다. 박헌영의 공산당 이외의 사회민주주의적 좌익정당은 우리조선에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민도가 그 수준에 가지 못하고 또 일제의 탄압이 워낙 가혹해 그 영향으로 극좌나 극우의 정당 외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내가 오늘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에게 잠깐 비춰봤는데 내가 추천하는 사람을 하나 넣어줄 것 같으니 나하고 해방일보에서 일을 같이 합시다』고 제의했다.
나는 책상에서 글만 쓰고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중속에 소리도 없이 파고들어가 함께 호흡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대중공작을 하고싶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나의 팔월회가 서부경남을 장악한다해도 그것으로 조선의 정권을 쥐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있기가 뭐해서 그 이튿날 이우적의 권고를 따라 소공동에 있는 해방일보사를 찾아갔다. 4층 건물인데 한가운데 정문에는 정판사라는 간판이 오른쪽 벽에 걸려있고, 옆 입구에 기다란 나무판자에 조선공산당 중앙본부라 쓰인 간판이 걸려있었다. 1층은 정판사 사무실, 2층은 공산당중앙위원회 사무실, 3층은 해방일보사가 쓰고 귀퉁이 조그마한 방 한칸을 경기도 당위원회가 쓰고있었다.
그때 이 방에 황태성(5·16후 박정희 정권에 김일성이 파견한 공작원)이 경기도 당위원으로 있었다. 4층에는 강문석이 소장을 맡고있는 산업노동조사소와 공산당이 경영하는 출판사(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음)가 있었다.
3층 한가운데 복도가 있고 왼쪽 맨 안쪽에 권오직 사장 방이 있었다.
유리창을 등으로 하고 큰 테이블에 앉아있는 이가 권오직이었다. 얼굴과 체격이 큰데다 입술이 두텁고 무뚝뚝한 인상이었다.
이우적이 나를 소개하니 의례적으로 일어서서 악수만 하고는 『원고를 하나 써 가지고 와보시오』라는 한마디뿐이었다. 경상도 사람들은 원래 무뚝뚝하지만 권오직의 나에 대한 첫 태도는 정말 냉담했다.
나도 더 할말이 없어 물러서니 이우적이 옆문을 열고 나를 데리고 간 곳이 편집국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앉아있었다.
아는 얼굴이 둘 있었다. 하나는 강병도고 또 하나는 뜻밖의 이상운이었다. 이상운은 나의 와세다대학 2년 후배며 영문과를 나온 사람이다. 이상운은 경북사람이다.
함경도출신 강진의 추천으로 해방일보 문예부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해방일보사의 사내사정을 말해주는데 기자들은 거의 전원이 비주류파라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권오직의 나에 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비주류의 맹장인 이우적이 추천하는 나를 반가이 맞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상운은 뒤에 강진을 따라 박헌영의 중앙위원회에 반대하고 김일성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53년에 남에서 간 사람들은 평양에서 거의 다 투옥·살해당했어도 그는 김일성대학교 영문학교수로 건재했다.
나는 창 밖으로 조선호텔만 내다보다가 해방일보사를 나왔다. 나는 속절없이 이우적파가 되어버렸으며 비주류파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파벌을 제일 싫어해 나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싶었으나 서울 중앙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었다. 파벌두목들은 각 중요기관에 자기파 사람을 넣으려고 염치없는 짓을 하고있었다. 강진은 해방일보편집국에 세 사람이나 넣고 강병도는 영업국에 자격도 없는 사람을 두 사람이나 넣었다.
나는 이우적에게 『내가 중앙에서 일을 하면 반드시 파벌에 휩쓸리게되니 역시 지방에 가서 조직사업을 하겠다』고 고집했으나 그는 『그런 걱정할 것 없다』고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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