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서연호<고려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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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80년대 우리 연극이 거둔 성과는 무엇보다도 창작극에 대한 확고한 인식정립과 활성화에서 찾을 수 있다. 7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현상이 점증되어 오기는 했으나 지난 10년 간에 걸쳐 뚜렷한 징후와 예술적인 성과를 드러내었다. 현대 연극이 시작된 이래 무려 70년 동안이나 우리의 연극, 혹은 명작극의 대명사는 곧 번역극이었다. 수용과 모방과 타자지향의 기나긴 세월이었다.
지금도 번역극의 수용이나 선호는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또한 창작극은 나름대로 숱한 결함을 지니고 있기는 하나, 그런 가운데서도 지난 몇 년간에 걸쳐 창작극은 괄목할 정도로 성숙된 것이 사실이다. 조심스럽게 감히 말한다면 이제 우리들에게 창작극은 자주적이고 창의적이고 유익한 연극문화로서 뒤늦게 자립의 위상을 확보해 가고 있다고 하겠다.
창작활동은 작품세계의 확장과 양식의 다양한 추구로 진행되었다. 일찍이 우리 연극에서는 금기 시 되었던 정치적인 이념이나 주장들이 강렬하게 부상되는가 하면(마당극·노동자연 극·정치풍자극), 현실적인 삶에 대한 근원적인 해석이 깊이를 더 하였고(신화극·우화극), 자라나는 세대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새로이 연극의 조명을 받게도 되었다(청소년극).
아울러 역사의식을 토대로 하는 현실의 구조적 분석이나(역사극),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현대적 수용(창극·놀이극), 혹은 민족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작품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연극양식의 추구와 절충은 연극의 언어와 기호에 대한 인식과 방법을 넓혔다.
리얼리즘이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는 있으나 이미 그것은 19세기식 낡은 틀로서가 아니라 작품세계의 확장에 따른 수정이나 절충, 혹은 변이를 가져온 상태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80년대의 연극에는 서사극·표현주의극·잔혹극·뮤지컬연극·기록극·창극·민속극·광대들의 촌극·무용극·환경연극·총체극 등 다양한 방식과 형식들이 중층구조를 이루거나 혼재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재료와 방법의 변화는 작품 전체의 모습과 느낌을 바꾸어 놓았다.
80년대 와서 연극제작의 여건과 연극을 중심으로 한 제도 및 환경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70여년 전 현대연극사의 시작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강행된 극장 취체(단속)와 대본검열제도는 불명예스럽게도 제6공화국이 세워지기 이전까지 지속되었으며, 오늘의 창작활동에 대한 자유는 우리 연극인들이 쟁취한 하나의 성과로 기록될 수 있다.
소극장 공간의 증설과 소극장 운동의 증대도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실험극장을 필두로 연우·산울림·현대·민예·문예회관 소극장·공간사랑·바탕골 등 시내 전역에 숱한 공간이 늘었고 그에 병행해 새 극단이 기하급수로 늘었으며 공연물도 끊일 새가 없었다.
경제의 성장과 함께 제작비가 크게 상승되어 온 것은 연극인들에게 커다란 압박이 되었다. 작품료·인건비·장소사용료·무대장치비·진행비 등 어지간한 소규모의 공연에도 1천만∼2천만원 정도는 쉽게 부서지는 형편이 되었다.
관객이 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취향도 다양해지고 관극수준도 높아졌다. 지난날 연극은 고급문화이고 극장에 가는 것 자체가 문화인으로 여겨지던 관념에서 벗어나 이제 오늘의 관객들은 작품에 대한 자발적 선택과 관극에의 즐거움과 참여를 동시에 충족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80년대는 과거의 그 어느 연대보다도 연극사적으로 변화가 많은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90년대, 혹은 2000년대의 연극에 값진 밑거름이 되거나 큰 변수가 될 것이다. 80년대를 보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그러한 변화들이 진정으로 우리 연극의 질을 상승시키는 변혁과 개혁의 수준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창작정신과 실험정신의 결핍, 연극적인 재능과 노력·기술의 부족이 연극인들에 의해 극복되고 아울러 사회적인 지원이 대폭 확대되는 시대가 새로이 열려야 할 것이다.
서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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