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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성종이 카사노바였대" 흥미진진 사극 같은 역사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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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조선 선비 살해사건 1.2

이덕일 지음, 다산초당, 372.416쪽, 각 권 1만4000원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을 얽고 엮어서 만들어 낸 한편의 드라마. '역사 저술가' 이덕일은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를 뿌리부터 파헤쳐 독자 앞에 내놓았다. 학창시절 외워도 외워도 안 외워졌던 사화와 당쟁, 이 때문에 가끔 조상 탓을 하기도 했던 40대 이후에겐 가위 충격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역사가 햇살에 비늘을 뒤틀며 물오름 치는 물고기처럼 생생히 다가선다.

이런 생생함은 물론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우선 '조선왕조실록'부터 '홍길동전'까지 풍부한 사료와 자료를 들이민다. 이런 사실(史實.事實)들은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결합해 독자들을 조선시대 선비와 군왕들의 삶과 죽음, 바로 그 현장으로 이끈다. 책 속에선 연산군의 대갈(大喝)과 단종의 단말마가 들리는 듯 생생하다. 아무리 많은 자료라도 역사 전체를 복원할 수는 없게 마련이지만, 사라진 역사의 고리들을 작가는 숙련된 숙수(熟手)의 솜씨로 복원해냈다.

깔끔한 소설보다는 투박한 논문투의 서술이지만, 풍부한 전고(典故)와 등장 인물들을 둘러싼 일화들은 지루함을 잊게 한다. 흥청망청의 유래 같은 것이 그렇다. 흥청(興淸)은 연산군 때 미모가 출중해 대궐에 뽑혀올 정도인 기생을 일컫는다. 고을마다 기생을 뒀던 연산군이 흥청의 지분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는 데서 나온 말이 흥청망청 이다. '물새들이 노니는 정자' 압구정(狎鷗亭)은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가 한강변에 지은 정자. 오늘날 압구정동의 유래가 됐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은 개경 근교의 두문동에 은거했던 고려말 온건 개혁파들에서 나온 말인데,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들이 바로 사림파를 잉태한 선비들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도 담아 읽는 맛을 더했다. 연산군이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를 그리워할 정도로 애처가였다던가, 성군으로 알려진 성종이 밤에는 카사노바였다는 점, 정도전이 유럽의 계몽사상가들보다 300년 앞서 '사회계약설'을 사실상 주장했다는 것 등이다.

작자는 역사 인물의 감정까지 섬세한 문법으로 읽어낸다. 학생시절 무심코 읊조리던 월산대군의 시구.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여기엔 동생 성종에게 왕위를 빼앗긴 월산대군의 한과 슬픔이 극한까지 억제돼 있다. 자칫 감정을 드러냈다간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 작자는 세 줄 시구에 담긴 애환을 낱낱이 풀어 독자에게 들려준다.

명쾌한 역사 해석도 눈에 띈다. 수양대군을 그는 왕권 약화의 주범으로 봤다. 수양을 권력의 찬탈자로 그린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나, 강력한 국가를 만들려 했던 힘있는 군주로 묘사한 김동인의 '대수양'의 해석을 모두 경계한다. 수양대군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강해진 것은 왕권이 아니라 공신들이 힘이란 주장이다. 이때 탄생한 공신들이 훈구파로, 훗날 조선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게 작가의 시각이다.

'조선왕 독살사건' '조선 최대 갑부 역관' 등으로 이미 검증된 작가의 상상력과 지적 유희에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어느덧 마지막 책장을 덮게 된다.

이정재 기자 jjyee@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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