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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회주의 틀 속에 시장경제 도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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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계획 경제에서 시장경제로」「스탈린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소련을 비롯 동구 어느 나라를 가나 한결같이 들리는 소리다.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7개국 모두가 전체주의적 국가체제를 해체하고 정치·경제개혁의 길에 나서고 있다. 20세기 인류를 양분해 왔던 지배적 이념인 공산주의가 세기말을 맞으며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독선적인 교조주의 대신 실용주의 노선을 모색하고 나름대로의 사회주의 이론 재정립을 시도하면서 지난 수십년 동안 서방 자본주의 세계에서 막연한 희망으로 치부해 왔던 동구 개혁의 실현이 눈앞에 다가선 것처럼 보인다.
동구의 개혁을 단순화하여 공산주의의 종언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소련의 70년, 다른 동구국가의 40년 지배 이데올로기가 일거에 자취를 감출 수 있는 것인가.
서방 세계에서는 단순히 공산주의 경제가 파탄했다는 사실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우월성을 입증했다는 생각에 만족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는 것인가.
변혁의 주체가 20세기를 지배해온 중심 이데올로기 중의 한 개 기둥이었다는 데서 이 실험의 영향은 비단 그들의 국가나 인접한 유럽사회 뿐 아니라 지구촌 구석구석, 이념의 갈등을 겪고있는 우리의생활에도 직접적으로 파급돼 오고 있다.
동구 시민·사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개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정치·경제현실, 개혁의 열기와 현장을 중앙일보 특별취재팀이 둘러보았다.
동구 7개국의 지도층 인사나 일반시민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정치적으로는 민주화,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 도입을 하겠다』는 말이다. 어느 나라를 가건 특정인의 의견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정의하는 말도 만나는 사람마다 대동소이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생명을 다했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정의는 담겨있는 이론이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겠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하지는 않겠다.』(폴란드국회집권당원내총무 게레메크)
『마르크스 이념은 어떤 때는 유용했다. 이 이념은 스탈린주의에 의해 왜곡됐다. 스탈린주의의 종언이지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정신이 끝난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헝가리 카를 마르크스 대학 총장)
『정신생활에서의 자유, 사회생활에서의 민주주의, 경제생활에서의 사회주의』(동독재야세력의 시위구호)
『시장경제 도입의 필요성을 모두 인식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너무 단순화시켜 교조적이 돼왔다. 레닌 원칙 회복에 노력하고 있다』(소련 콤소몰 부위원장)
한결같이 사회주의 원칙에 충실하며 시장경제를 도입하겠다는 얘기다. 시장경제가 자본주의사회로 가는 과정이 아니냐는 반문에는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개혁의 의지는 여러 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불과 2∼3년 전 만해도 귀따갑던『공산주의사회가 지상의 낙원』이란 그들의 자랑은 어디 가서도 더이상 들을 수 없었다. 경제가 어렵고 정치가 나빴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14인치 텔레비전 1대를 사려면 10개월 치 봉급을 다 털어 넣어야 하는 사회 헝가리에서는 노동자 평균월급 3천 포린트(3만원)에, 텔레비전 1대에 2만8천 포린트.
폴란드에서는 카세트 하나 달린 라디오 하나에 28만5천 즐로티(2만원)로 평균 월급 30만 즐로티와 거의 맞먹는 가격이었다. 동구 사회에서도 필수로 생각하는 자동차를 마련하는데 공식루트를 이용하면 10∼20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불가리아 소피아대학의 한 경제학 교수는『마누라 바꾸는 게 자동차 바꾸는 것보다 손쉽다』고 자조 섞인 익살을 늘어놓기도 했다.
공산주의 사회가 의식주의 기본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그 해결의 한가지 예를 직접 체험했다.
소피아 중심가에서의 점심시간. 식당마다 장사진을 이뤄 인파가 적은 핫케이크를 파는 스낵 가게 앞에서 기다리기 30분. 어쨌든 식사는 했으니 사회주의적 의미에서는 해결한 셈이다.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이 모자라 상점마다 장사진을 이룬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길거리에서 빈손으로 다니는 사람을 보기가 어려웠다. 비닐백이나 큼직한 가방을 모두 들고 있었다. 언제 어느 상점에 무슨 물건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길가다 줄서기 위해 항상 들고 다닌다는 얘기다. 모스크바건, 바르샤바건, 소피아건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엔 이른 아침부터 시민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바르샤바의 한 대학생에게 아침부터 백화점을 돌아다니면 일은 언제 하느냐고 물었더니『나도 궁금한 일』이라고 얼버무리기도 했다.
렌즈에 담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댔던 사진기자가『사람만 보이고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는게 실감나는 얘기였다.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보자면 동구의 평등은 흔히들 말하듯「빈곤의 평등」「결핍의 평등」「게으름의 평등」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금년 인플레가 1천5백%를 기록하고 있는 유고슬라비아. 노동시간은 8시간으로 규정돼 있지만 전체 근로자의 노동시간은 3시간14분밖에 되지 않는다. 60%는 필요 없는 노동력이기만 모두가 공평하게 봉급을 받고 있다.
불가리아의 평균 노동시간은 4시간. 두 나라에서 만난 경제학 교수의 말이었다. 유휴노동력을 해고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50∼60%의 실업자를, 양산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경제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사회주의 틀 속에서의 시장경제」를 역설하는 두 교수는 설명했다.
소련과 동독을 제외한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지향하는 개혁의 방향은 한결같이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라고 입을 맞춘 듯 얘기하고 있었다. 지식층에서 일반직장 사무원에 이르기까지 접촉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의 의견이었다. 결국 스웨덴식 자본주의를 겨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물음에 한사코 스웨덴식 사회주의만을 그들은 강조했다.
불가리아에서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운영한다는「최첨단」의 산업정보회사(데이타 뱅크)의 고급간부들과 인터뷰하며 인센티브 제도도 도입하느냐고 물었더니 서로 그것이 무엇이냐고 의논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혁의지는 충분하면서도 이처럼 모순된 논리나 시장경제에 대한 무지를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스탈린주의 체제 해체에 따른 정치개혁이건, 시장경제 요소 도입에 따른 경제개혁이건 40년 동안 익힌 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 속에 노출되고 있는 그들의 입장을 소피아대학의 한 경제학 교수는 재미있게 표현했다.『캄캄한 방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햇살이 있는 밖으로 나온 경우와 같다』는 얘기였다. 동구사회가 겪게 될 격렬한 진통과 혼란을 적절하게 시사한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레닌주의를 고수하며 소련사회를 이끌어갈 젊은 엘리트인 소련 공산주의자 청년동맹(콤소몰)의 30대 부위원장도 방향은 다르지만 혼란을 예감한 듯한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지금 혁명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모르고 있다. 무르익고 있는지, 끝나고 있는지…』
영국 가디언지의 칼럼니스트 존 파머는 이런 동구의 개혁 현상을 두고『개혁 의지를 가진 동구 지도자들이 숨가쁜 정치도박을 벌이고 있다. 국민들을 자유시장 경제의 긴장과 불확실성으로 몰아가고 있다.
서방이 이들의 개혁에 희망을 걸고 있다면 파국이 오기 전에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할 것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공산주의 경제의 실패에 따른 자본주의 세계의 승리감에만 젖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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