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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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차기 일본 총리로서 확고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이 지난달 '아름다운 국가로'란 책을 냈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을 자신과 자긍심을 갖는 국가로 만들고 싶으며 나는 '싸우는 정치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4, 5년 전 일본서 젊은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신세대 총리선언'이란 세미나가 열린 적이 있다. 여기서 아베 장관은 "아베 내각이 탄생한다면 국민에게 제시할 국가상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인이 일본에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배경은 "정말로 분발하는 일본인의 모습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데 있다"고 진단했다.

그가 그런 한 예로 든 것을 조금 길지만 옮겨본다. "고이즈미 총리의 아시아 순방 시 인도네시아에서 영웅묘지에 참배한 적이 있다. 어느 나라를 방문하든 무명전사가 안치된 영웅묘지에 참배하지만 인도네시아 영웅묘지의 경우 20명의 일본인이 안치돼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인 1000명이 인도네시아인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네덜란드군과 싸울 것을 결의하고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전쟁이 끝나고 무장해제한 그들은 무기를 버린 장소를 인도네시아 게릴라에게 알려주고 가져가게 했다. 그 독립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인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영웅묘지에 안장했다. (중략) 이런 일본인도 있다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세계에서 분발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좀 더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일본 총리를 꿈꾸는 사람들', 중앙 M&B)

이런 걸 더 알면 자부심을 갖게 될까. 아베의 말에 담긴 역사인식은 기본적으로 '동남아 국가들의 전후 독립은 일본군의 남방 진출이 계기'였다는 일본 후쇼사의 극우교과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 여전히 좀 더 알아야할 것은 만주 침략 이래 일본이 벌인 15년 침략전쟁에서 죄 없이 스러진 아시아 제국(諸國) 2000만 생령(生靈)과, 전쟁에 내몰려 죽어간 300만 자국민의 불행한 역사이지 이런 에피소드가 아니다.

이런 인식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일본 헌법 개정 문제다. 야스쿠니 참배와 관련한 아베 장관의 요즘 태도는 이중적이지만 내심은 확고하다.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자민당 전 간사장이 "고이즈미는 A급 전범에 관계없이 추도의 마음을 바친다는 생각이지만 아베는 도쿄전범재판의 부정이 근저에 있어 심각하다"고 할 정도다. 헌법 개정과 관련해서도 지난달 북한 미사일 발사 시 이른바 '적 기지 선제공격론'을 들고 나왔듯 자위권 확대를 위한 개헌, 또는 확대해석을 주장한다.

아베 장관은 전후 61년이란 기간이 반성에 충분한 시간이고,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은 이웃나라들의 '피해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그럴까.

이어령 선생이 일본 '중앙공론'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일본말로는 긍지도 먼지도 '호코리'다. 아무리 발음이 같다 해도 '먼지'가 결코 '긍지'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긍지는 그 먼지를 털어내는 데서 시작할 것이다." 1978년 A급 전범의 야스쿠니 합사와 그 후 벌어진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의 잇따른 참배, 군사대국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개헌 논의는 역사의 '먼지'를 털기는커녕 다시 들쑤셔 일으키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일본을 알려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일본책 중에 '일본을 아는 105장(章)'이라는 일.영 대역본이 있다. 이 중 한 장인 '일본국 헌법'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일본인에 있어 일본국헌법은 하나의 커다란 꿈이며 문화며 전쟁의 참화를 대상(代償)으로 손에 넣은 국민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다. 이 헌법의 철저 평화주의에 의해 우리들은 21세기로 향하는 인류의 발걸음에 한발 앞서있다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세계 2위의 경제력 외에도, 나 스스로 보고 느낀 인류 보편의 소중한 가치를 지닌 다양한 문화유산들과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안전하고 깨끗한 도시와 따뜻한 인정, 이런 모든 것들이 일본이 충분히 가져도 좋은 자부심의 원천 아니겠는가.

박태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