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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북한의 속셈, 문 정부의 패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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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경제학부 교수

남북 통신선은 연결된 지 2주 만에 불통 상태에 빠졌다. 김여정이 취소하라고 요구했던 한미 연합훈련을 예정대로 실행한 데 대한 반발일까. 형식적으론 그렇겠지만 북한의 셈법은 훨씬 복잡해 보인다. 이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위주의 훈련에 대해 북한이 보이는 과잉 반응에서 드러난다. 김여정은 주한미군 철수로 해석될 수 있는 주장까지 내놓으며 판을 키웠고, 한 술 더 떤 김영철은 엄청난 안보 위기를 느끼게 해 주겠다며 한국을 위협했다. 규모를 더 줄인 훈련에 대해서 북한이 이전보다 훨씬 거세게 대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문재인 정부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

통신선 연결로 그냥 지원받으면 #자력갱생 실패 인정하는 모양새 #연합훈련 취소로 포장하려 시도 #정부, 희망과 실력 괴리 심각해

김정은의 속셈을 아는 단서는 북한 정권이 어떤 내용을 주민에게 알렸고 어떤 내용을 알리지 않았는지다. 김여정과 김영철의 담화는 공개한 반면 통신선 연결은 알리지 않았다. 언뜻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통신선 연결은 경제적으로 힘든 북한 주민에게 반가운 소식이지만, 긴장과 대결을 함축하는 담화는 낙담되는 뉴스다. 남북 통신선이 연결된다면 남한의 인도적 지원이 뒤따를 수 있고 이는 김정은에 대한 주민의 지지에도 도움이 될 법한데, 왜 북한 정권은 좋은 소식은 감추고 나쁜 소식은 공개했나. 이 기이한 결정을 제대로 알려면 김정은의 시각으로 이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독재자의 모든 길은 권력으로 통한다. 김정은은 통신선 연결의 성과로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북한이 가장 필요한 식량 등의 지원을 그냥 받으면 김정은이 수없이 외친 자력갱생의 실패를 대내외에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독재 권력의 몰락은 권력자의 하찮은 실력을 주민과 권력층이 알아차릴 때 시작된다. 하노이 회담의 결렬로 이미 그의 외교 실력의 밑천이 드러난 상태에서 경제에서도 자충수를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식량난을 완화해 주민의 마음을 일시적으로라도 얻기 위해선 외부 지원을 받아야 하겠지만 김정은은 자력갱생을 주창한 그의 권위가 훼손될 것이 두려웠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인과관계를 뒤바꾸고 분식(粉飾)하는 것이다. 북한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남한이 사정해서 통신선이 연결됐다는 논리와 정황을 만들어 사후에 공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미 연합훈련의 취소는 김정은에게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었다. 주민에게 선전할 내러티브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남조선이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면서까지 통신선 연결을 사정했으니 그동안 과오를 용서하고 통신선 연결에 동의했다. 또 남조선이 감사의 뜻으로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니 필요하진 않으나 민족의 아량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이는 위원장 동지의 정책이 가져온 위대한 승리요, 우리 공화국의 자력갱생 노선을 치켜세우는 역사적 전환이다.”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의 의도를 망쳐 놓았다. 군사훈련을 취소한 것이 아니라 축소해서 실행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는 프로파간다에 써먹을 수도 없고 김정은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통신선 연결의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다. 김정은은 경제적 이익도 얻고 권력도 강화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더 나아가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사훈련을 중단했다면 그 관성으로 남북경협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할 터이고 그 결과 제재의 국제공조가 허물어질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은 임기가 9개월 남은 문 정부에게 승부수를 던질 것을 요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큰 실망감의 표현이 거친 언사다.

김정은은 딜레마에 빠졌다. 권력은 성과와 권위가 결합할 때 강화되지만 지금은 성과와 권위가 동시에 추락하고 있다. 성과의 핵심인 경제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한국은행은 최근에 지난해 북한 경제성장률을 -4.5%로 추정했다. 그러나 한은의 추정치는 제재와 코로나로 급격히 위축된 시장 활동을 제대로 포함하지 못한다. 지난해 북한의 시장 활동은 적어도 10% 이상 감소했을 것이다. 시장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가 총국민소득의 25%라는 가정을 하면, 이는 국민소득을 2.5% 떨어뜨린 셈이다. 따라서 작년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7% 이하였을 것이다. 또 식량 가격이 폭등하자 군량미까지 방출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무역 봉쇄의 원인인 코로나 사태는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이처럼 경제난으로 그의 권력이 위축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북한이 왜 통신선 연결에 동의했겠나.

김정은의 딜레마가 더 깊어져야 비핵화의 문이 열린다.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이외 다른 출구가 있을 것으로 믿게 만드는 대북정책은 역효과만 낸다. 한미 연합훈련 축소도 패착이다. 안보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신뢰를 얻지 못했음은 물론 북한까지 반발하고 있다. “통신 연락선이 완전히 복원됐다”던 정부는 아무 말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출제 문제와 상관없이 항상 똑같은 답만 쓰는 학생 같다. 이념과 희망 대비 실력의 격차가 역대 정부 중 가장 심하다. 통신선이 다시 연결된다 해도 이 실력으로는 어림없다. 북한을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다운 정책을 펴야 한다. 실력 없는 줄타기는 위험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