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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이북식 냉면, 소백산 자락에서 만나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3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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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경북 영주시 풍기읍은 예부터 ‘작은 평안도’로 불리었다. 조선 시대의 예언서 『정감록』에 십승지(十勝地) 중 첫 번째로 풍기가 소개되면서 이를 믿고 월남한 사람이 많았다. 1960년대, 풍기 인구 약 3분의 1이 이북 출신일 정도였다. 자연스레 이북 음식점도 많았다. 대개 명맥이 끊겼지만 여태 정통 이북식 냉면을 파는 식당이 남아 있다. 지난 22일 소백산 자락 풍기를 다녀왔다. 음식 맛도 인상적이었지만 냉면을 만드는 사람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영주시 풍기읍의 냉면집 두 곳
월남한 이북 주민이 지켜온 맛
진한 메밀향, 소고기 육수 일품
돼지 등뼈와 끓인 콩비지도 별미

평양 맛에 버금가는 냉면

경북 영주 풍기읍에 자리한 ‘원조 서부냉면’은 50년 내력을 자랑하는 식당이다. 주방 뒤쪽에서 직접 메밀을 제분해 면을 뽑고 한우로 육수를 내며 정성스럽게 냉면 한 그릇 한 그릇을 만든다.

경북 영주 풍기읍에 자리한 ‘원조 서부냉면’은 50년 내력을 자랑하는 식당이다. 주방 뒤쪽에서 직접 메밀을 제분해 면을 뽑고 한우로 육수를 내며 정성스럽게 냉면 한 그릇 한 그릇을 만든다.

올해 들어 KTX가 운행하기 시작한 풍기역 앞에는 인삼 가게와 인견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대부분 이북 피난민이 운영하는 곳이다. 약 50년 내력을 자랑하는 ‘원조 서부냉면’도 인삼, 인견 가게 즐비한 골목에 자리한다. 평안북도 영변 출신인 고 김숙인씨가 1970년대에 식당을 열었다. 김씨는 고향서 먹던 냉면을 재현하면서도 남쪽 사람도 좋아할 만한 맛을 연구했다. 덕분에 식당은 개업 후부터 문전성시를 이뤘다. 지금은 김씨의 둘째 아들 부부가 식당을 지킨다.

서부냉면의 메뉴는 단출하다. 냉면(1만원)과 불고기(1만8000원)가 전부다. 냉면 하나라도 변치 않는 맛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김씨 며느리 명연옥(60)씨는 “어머니가 하던 방식 그대로”를 신조처럼 삼는다. 특히 면발에 대한 고집과 자부심이 남다르다. 식당 뒤편 작업실에서 메밀을 직접 제분하고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면발을 뽑아서 삶는다. 육수도 허투루 만들지 않는다. 한우 사골과 갈비 등으로 약 달이듯 끓여서 만든다. 동치미 국물은 섞지 않는다.

명씨는 “냉면뿐 아니라 밑반찬에도 화학조미료를 일절 쓰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물냉면 맛이 서울의 평양냉면집과 비교해도 심심한 편이다. 그러나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 고소한 메밀 향과 치장하지 않은 소고기의 깊은 맛이 은은하게 입속에 번진다. 일본인 한식 칼럼니스트 하타 야스시(八田靖史)가 “한국의 많은 냉면집 중 서부냉면이야말로 평양에서 먹어본 냉면 맛에 가장 가까웠다”는 평을 남겼다.

집에서 먹던 가정식 그대로

‘서문가든’도 피난민 2세대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새콤달콤한 냉면은 수육과 무 절임을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다. 통째 간 콩과 돼지 등뼈, 시래기를 뚝배기에 넣고 끓인 이북식 콩비지도 별미다.

‘서문가든’도 피난민 2세대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새콤달콤한 냉면은 수육과 무 절임을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다. 통째 간 콩과 돼지 등뼈, 시래기를 뚝배기에 넣고 끓인 이북식 콩비지도 별미다.

풍기읍에 자리한 ‘서문가든’도 이북식 냉면을 파는 집이다. 역시 이북 피난민 후손이 운영한다. 허정(66)·박순희(60)씨 부부가 1995년에 개업했으니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평안북도 구성에 살던 허씨 아버지 고 허왈섭씨는 해방 후 월남했다. 부산에서 빵을 팔며 가족이 따라 내려오길 기다렸다. 곧 전쟁이 터졌고 가족 9명이 피난길에 나섰다. 강원도 철원에서 비극이 벌어졌다. 미군의 폭격을 받아 허정씨 조부를 제외한 가족 8명이 몰살됐다. 부산에서 아버지를 만난 허왈섭씨는 풍기에 터를 잡고 직물공장을 열었다. 허정씨도 가업을 이어받았다. 번창하던 사업은 거래처에 큰돈을 떼이면서 주저앉았다. 95년 공장 자리에 식당을 열게 된 배경이다.

허정·박순희씨 부부가 이북 출신은 아니지만 냉면이 낯설진 않았다. 부모님과 집에서 자주 해 먹던 음식이어서다. 박순희씨는 “개업 초기 풍기에 살던 평안도 출신 어른들의 도움도 받아서 정통 이북식 맛을 재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문가든 냉면(9000원)도 자극적이지 않다. 서부냉면보다 신맛, 단맛이 조금 더 강한 정도다. 이 식당의 또 다른 별미는 이북식 콩비지(9000원)다. 불린 콩을 갈아서 시래기, 돼지 등뼈와 함께 뭉근하게 끓여낸다. 서문가든을 찾은 실향민이 냉면과 함께 꼭 찾는 메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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