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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공·검의 도넘은 감정싸움…"구경하라고 만들었나"

중앙일보

입력

‘IMF(외환위기) 시대를 맞아 온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법이론에 기초한 대응이 아니라 감정적 대립을 보이는 것은 어느 기관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1997년 12월 26일 중앙일보 6면에 실린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갈등’이란 제목의 사설(社說) 일부다. ‘IMF’를 ‘코로나19’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검찰’로 바꾸면 24년을 뛰어넘는 평행이론이 성립한다.

공수처와 검찰은 지난 1월 21일 공수처 출범 이후 크고 작은 권한 다툼을 벌여 왔다. 급기야 최근엔 감정싸움을 공연히 노출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전날(25일)엔 사건 이송 서류를 인편으로 보내냐, 우편으로 보내냐를 두고 언론을 통해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요컨대 이랬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소속 한 수사관이 지난 5월 13일 수원지검에서 이첩한 사건 기록을 정부과천청사 내 공수처 사무실로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소속 한 수사관이 지난 5월 13일 수원지검에서 이첩한 사건 기록을 정부과천청사 내 공수처 사무실로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공수처=“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건을 검찰에 이첩할 때마다 왜 매번 인편으로 서류를 보내야 하느냐. 공수처를 하급기관으로 보는 ‘갑질’이다.”
대검=“사전 협의 없이 공수처에 이첩 서류를 직접 들고 오라고 하거나 우편 접수를 거절한 적이 없다. 사건 기록은 적어도 수천 쪽에 이르기 때문에 우편 송달이 부적절한 경우가 많아 공수처가 관례상 인편으로 보내 왔다.”

지난 3월 공수처의 ‘조건부(유보부) 이첩’ 주장, 지난 2월 대검이 만든 ‘고위공직자범죄 사건 이송·이첩 등에 관한 지침’(대검 예규) 등을 둘러싼 양 기관 사이 다툼은 법적 명분이라도 있었다. 조건부 이첩의 경우 검사의 고위공직자범죄 사건은 공수처도 기소권을 가지도록 한 공수처법 입법 취지와, 공수처가 사건을 이첩한 경우 검찰이 법에 규정된 권한(수사·기소)을 행사하는 게 적법한 일이란 논리가 충돌했다.

검사의 고위공직자범죄 등에 관한 진정 사건이나 다른 수사기관에서 입건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고위공직자범죄 사건 등은 검찰이 자체 종결할 수 있도록 한 대검 예규도 마찬가지다. 공수처는 ‘공수처 외 다른 수사기관이 검사의 고위공직자범죄 혐의를 발견한 경우 해당 사건을 공수처에 이첩해야 한다’는 공수처법 25조 2항 위반이라고 주장했지만, 대검은 ‘혐의’라는 건 조사를 해봐야 발견할 수 있는데 조사 결과 발견되지 않으면 이첩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석으로 반박했다.

김오수(오른쪽) 검찰총장이 지난달 8일 정부과천청사 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방문, 김진욱 공수처장을 예방하며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뉴스1

김오수(오른쪽) 검찰총장이 지난달 8일 정부과천청사 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방문, 김진욱 공수처장을 예방하며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뉴스1

이러한 법적 권한 다툼은 대개 공수처법을 정교하게 만들지 않은 입법 미비에서 비롯했다. 과거 중앙일보 사설이 논평했듯, 1988년 9차 개정 헌법 시행으로 헌법재판소가 출범한 뒤에도 대법원과 유사한 다툼이 있었다. 헌재가 “법령 자체는 위헌이 아니지만, 특정 방향으로 해석하는 한 위헌”이라는 취지로 몇몇 대법 확정판결에 ‘한정위헌’ 등 변형 결정을 내리자 대법이 “법령의 해석·적용 권한은 법원의 전속 관할”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헌법재판소법이 금지하고 있는 ‘재판소원’(법원 판결에 대한 헌법소원)과 직결되는 문제라 대법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후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이 뜸해지며 갈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관련 입법 정비가 이뤄지지 않아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국회에선 헌재와 대법의 권한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한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이 수 대에 걸쳐 수차례 발의됐으나 번번이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국민의 권리 구제나 기본권 보호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단순히 거대 국가기관 사이 주도권 다툼으로 비쳐 여론의 관심을 끌지 못한 탓이란 분석이 많았다.

전례를 모르지 않을 공수처와 검찰의 구성원들도 국회와 협력하며 해결책을 모색하기는커녕 법원에서 사법부의 판단을 구하려거나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데 급급하다. 이젠 이송 서류 송달 방식 등 지엽적인 문제로도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다. 기관 갈등이 공수처 출범 6개월이 넘도록 장기화하는 동안 각종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본연의 임무는 뒷전이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에겐 피로감만 쌓여가고 있다. 관련 기사에는 “가만히 지켜보니 공수처는 기관끼리 싸움 붙여놓고 국민은 싸움구경 하라고 만든 기관”이라고 비아냥대는 댓글이 달렸다.

공수처와 검찰이 이제라도 중단된 실무협의체를 재가동하고, 부디 서로의 권한보다 국민의 권익 보호를 위한 개선책 마련에 지혜를 모으길 기대한다.

참고문헌

김현철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법부 구조개혁에 관한 연구-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갈등관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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