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오디세이

칼 군무 품새, 공중 6연속 격파…세계를 홀린 종주국의 힘

중앙선데이

입력 2021.07.24 00:21

업데이트 2021.07.24 01:16

지면보기

746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

당찬 기합으로 태권도 정신을 표현한 서훈(왼쪽)과 최명길. 힘차게 뻗은 최명길의 주먹을 이중 노출 기법을 활용해 찍었다. 전민규 기자

당찬 기합으로 태권도 정신을 표현한 서훈(왼쪽)과 최명길. 힘차게 뻗은 최명길의 주먹을 이중 노출 기법을 활용해 찍었다. 전민규 기자

“태권도, 재밌나?”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재미없다”는 응답이 많을 것 같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태권도는 두 선수가 겅중겅중 뛰면서 변죽만 울리다 경기가 끝나는 경우가 태반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결승에서 문대성이 그리스 선수를 뒤후리기 한 방으로 눕힌 ‘전설’ 같은 장면이 전해오긴 하지만….

미 NBC ‘아갓탤’서 골든 버저 받아
1000만 클릭 넘어, 내달 우승 도전
‘평화는 승리보다 귀하다’ 메시지

전국 고수 500여명 중 20명 선발
기존 단원 포함 해마다 ‘생존 경쟁’
돈보다 명예·경험…자기관리 철저

그런데, 이 태권도에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한다면? 종주국인 대한민국도 태권도의 반쪽만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전 세계를 돌며 태권도의 아름다움과 쫄깃한 재미를 알리는 첨병이 있다. ‘태권도 시범단’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단체인 국기원 소속 시범단은 주로 정부 행사나 해외 귀빈을 맞을 때 활약한다. 대한태권도연맹이나 각 대학 소속 시범단도 뛰어난 기량을 자랑한다.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은 레체(사진), 비엔나, 토리노, 로잔 등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태권도 정신과 아름다움을 알린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AGT 유튜브 캡처]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은 레체(사진), 비엔나, 토리노, 로잔 등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태권도 정신과 아름다움을 알린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AGT 유튜브 캡처]

2009년 창단한 세계태권도연맹(WT·총재 조정원) 산하 시범단은 지난 6월 방송된 미국 NBC의 인기 프로그램 ‘아메리카 갓 탤런트’(AGT)에서 8강 직행을 뜻하는 ‘골든 버저’를 받았다. AGT는 노래·춤·마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 또는 단체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우승 상금은 약 11억원이다.

WT 시범단은 칼 군무를 연상시키는 품새, 동료를 밟고 4m 이상 날아올라 6개의 송판을 잇달아 격파하는 묘기, 힘과 아름다움이 넘치는 발차기를 선보이며 관객을 압도했다. 심사위원 4명은 3분 30초 퍼포먼스를 보는 내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진행자는 “용기, 자신감, 상호존중을 느꼈다”며 주저 없이 골든 버저를 눌렀다. 이들의 무대 영상은 유튜브에서 10일도 지나지 않아  조회수 1000만을 훌쩍 넘겼다.

WT 시범단은 8월 중순으로 예정된 8강-준결승-결승을 앞두고 각기 다른 퍼포먼스를 완벽하게 시현하기 위해 폭염 속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시범단의 두 선수를 중앙UCN 스튜디오로 초대했다. 2019년부터 시범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22살 동갑내기 최명길(우석대4), 서훈(전주비전대4) 선수다.

“용기·자신감·상호존중 느꼈다”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은 레체, 비엔나(사진), 토리노, 로잔 등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태권도 정신과 아름다움을 알린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AGT 유튜브 캡처]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은 레체, 비엔나(사진), 토리노, 로잔 등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태권도 정신과 아름다움을 알린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AGT 유튜브 캡처]

이들에게 ‘아갓탤’ 경연 뒷얘기부터 들었다. 서 선수는 “너무 긴장해 심사위원을 볼 수도 없었는데, 끝나고 나서 그분들 표정에 놀라움·신기·신비·흥미가 다 드러났어요”라고 말했다. 최 선수는 “골든 버저가 울리고도 긴가민가했는데 위에서 금가루가 떨어지는 순간 비로소 실감이 났어요.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그 하루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어요”라고 회상했다.

관객이 어떤 장면에서 가장 열광했는지 묻자 서 선수는 “동료를 딛고 점프해서 공중에서 발차기 여섯 번으로 여섯 개 송판을 격파하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연습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두 선수 모두 “군무에서 디테일한 동작을 똑같이 맞추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은 레체, 비엔나, 토리노(사진), 로잔 등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태권도 정신과 아름다움을 알린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AGT 유튜브 캡처]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은 레체, 비엔나, 토리노(사진), 로잔 등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태권도 정신과 아름다움을 알린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AGT 유튜브 캡처]

현재 WT 시범단(단장 나일한)에는 총감독 아래 연출과 안무 담당 감독, 남녀 코치, 남자 34명, 여자 10명의 단원이 있다. 대부분 태권도를 전공하는 대학생인 단원들은 주말에 경기도 성남시 가천대 체육관에 모여 하루 종일 강도 높은 훈련으로 호흡을 맞춘다.

이들은 고정 급여를 받지 않고 훈련 수당과 해외 공연 시 체재비 정도만 지원받는다. 두 선수는 “금전적인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주면 좋고 안 줘도 상관없습니다. 돈보다 더 값진 경험을 하니까요”라고 약속이나 한 듯 말했다.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은 레체, 비엔나, 토리노, 로잔(사진) 등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태권도 정신과 아름다움을 알린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AGT 유튜브 캡처]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은 레체, 비엔나, 토리노, 로잔(사진) 등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태권도 정신과 아름다움을 알린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AGT 유튜브 캡처]

이들에게는 대한민국 국기(國技) 태권도를 대표하며 세상에 알린다는 명예와 자부심이 대단하다. 최 선수는 “자체 규율이나 품위 유지에 대한 규정 같은 건 없지만 생활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반드시 지킵니다”고 말했다. 서 선수도 “운동선수이자 프로로서 타율(他律)이 아닌 스스로 몸 관리를 해야 하고, 최고의 컨디션으로 최선의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는 자세가 몸에 배 있습니다”고 말했다.

WT 시범단은 해외 공연이 끝날 때마다 ‘평화는 승리보다 귀하다(Peace is more precious than Triumph)’는 글귀를 해당 국가 언어로 쓴 현수막을 펼친다.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의 선친이자 경희대 설립자인 고(故) 조영식 박사가 남긴 말이다. 시범단은 태권도의 평화 정신을 늘 공연의 피날레에 새겨 놓는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기술 보여줘야

미국 인기 예능 ‘아메리카 갓 탤런트(AGT)’에선 극찬을 받으며 결선에 오른 WT 시범단. [사진 세계태권도연맹·AGT 유튜브 캡처]

미국 인기 예능 ‘아메리카 갓 탤런트(AGT)’에선 극찬을 받으며 결선에 오른 WT 시범단. [사진 세계태권도연맹·AGT 유튜브 캡처]

서훈 선수는 고3이던 2017년 전북 무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태권도 시범단의 모습을 보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시범단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대학 입학 후 밤에 잠도 안 자고 연습에 매진해 꿈을 이뤘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태권도 고수들 500여명이 참가하지만 합격하는 사람은 20명 남짓이다. 기존 단원들도 1년에 한 번씩 지망생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치러 합격해야 시범단에 남을 수 있다.

시범단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서 선수는 “현재 태권도 시범에서는 기존에 쓰는 기술이 다 나왔다고 봐도 됩니다. 결국 새롭고 신박한, 나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을 보여주는 게 합격의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최 선수는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없다면 기존 시범단의 발차기와 기술을 보면서 그것보다 더 완성도를 높이도록 연습해야 합니다”고 귀띔했다.

인터뷰 말미에 각자 여자친구에게 영상 편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이들은 얼굴이 빨개지며 버벅거리다가 “다시 할게요”를 반복했다. 영락없는 20대 초반 순진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끝나고 시범을 보이는 순간 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절도 있고 힘찬 날아차기에 스튜디오에는 함성과 박수가 터졌다.

※WT 태권도 시범단의 인터뷰와 해외 공연 영상은 유튜브 채널 〈UCN SPORT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태권 트롯’ 나태주처럼 다른 장르 결합해야 롱런
나태주

나태주

태권도 시범단의 놀라운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보면서 ‘이런 멋진 장면을 영화나 뮤지컬, 웹 드라마 속에 녹여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했다. 중국 쿵푸가 이소룡·성룡 같은 월드 스타를 앞세워 세계를 공략한 것처럼 말이다.

실은 태권도를 소재로 한 영화나 장기 공연이 없었던 게 아니다.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스토리의 힘이 떨어졌고 퍼포먼스와 연기력을 겸비한 스타도 나오지 못했다.

지난해 ‘미스터 트롯’을 통해 혜성같이 등장한 나태주(31·사진)는 ‘태권도와 엔터테인먼트의 콜라보’ 가능성을 보여줬다. 태권도 품새 국가대표 출신인 나태주는 고난도의 퍼포먼스를 펼치면서도 박자 한번 놓치지 않고 트로트를 구성지게 불러냈다. 태권도 시범단 최명길 선수는 “나태주 선배의 실력을 인정합니다. 그분을 통해 태권도를 알릴 수 있는 길이 좀 더 다양해졌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이평길 세계태권도연맹 홍보팀 과장도 “태권도는 다른 프로 스포츠에 비해 선수 수명이 짧습니다. 시범단에도 끼와 실력을 겸비한 출중한 자원이 많지만 활동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져 버리죠. 싹수 있는 선수를 장기적으로 키우고 태권도와 문화예술의 콜라보 상품이 나올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이 필요합니다”고 강조했다.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