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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현실로 만드는 ‘피터팬’, 파리 올림픽 ‘골드 바’ 넘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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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높이뛰기 4등 우상혁

도쿄 올림픽 높이뛰기에서 4위에 오른 우상혁이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도쿄 올림픽 높이뛰기에서 4위에 오른 우상혁이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도쿄 올림픽은 ‘우상혁’이라는 신인류를 대한민국에 선물했다.

간발의 차로 메달 놓치고도 경례 #행복과 긍정 아이콘으로 떠올라 #재능 알아본 김도균의 ‘멘탈 코칭’ #개인 최고기록 4㎝ 경신 밑거름 #“자가격리 중 배달음식 실컷 먹어” #조각같은 몸매 덕에 모델 희망도

우상혁(25·국군체육부대)은 8월 1일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2m35㎝를 뛰어 24년 만에 한국신기록을 세웠고, 마라톤을 빼고는 한국 육상 사상 올림픽 최고 성적인 4위에 올랐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평소 기록을 지키기도 힘들다는 올림픽 무대에서 자신의 최고기록(2m31㎝)을 4㎝나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우상혁은 경기 내내 “할 수 있다” “레츠 고” 같은 혼잣말을 반복했고, 2m35㎝를 넘은 뒤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막판 2m39㎝에 도전, 다리가 살짝 바에 걸리는 바람에 금메달을 놓쳤지만 우상혁은 “괜찮아”라며 활짝 웃은 뒤 중계 카메라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도쿄에서 귀국해 자가격리 중인 우상혁과 잠깐 통화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많은 미디어가 그를 찾는 바람에 국군체육부대에서 통제를 했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신청해 인터뷰 기회를 얻은 중앙일보 후배에게 몇 가지 질문을 부탁했고, 주변 지인들을 취재해 ‘우상혁 신드롬’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초긍정 마인드

금메달을 목표로 2m39㎝에 도전한 우상혁. 종아리가 바에 살짝 걸리면서 아쉽게 실패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금메달을 목표로 2m39㎝에 도전한 우상혁. 종아리가 바에 살짝 걸리면서 아쉽게 실패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우상혁은 자신의 성격에 대해 “완전 외향적이고 엄청 긍정적이다”고 했다. 우상혁의 지인은 “상혁이에겐 순수함과 환상을 좇는 피터팬 같은 면이 있다. 그런 성격이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 낸 힘이 됐다”고 말했다.

우상혁은 “‘할 수 있다’ ‘후회 없이만 하자’는 말을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입 밖으로 계속 내뱉었다. 스스로 주문을 건다고 생각하고 했더니 그게 진짜 이뤄지더라”고 당시 상황을 되짚었다. 그는 또 “한참 뒤 도쿄 올림픽을 돌아보면 ‘나 참 잘 즐겼다. 이게 바로 스포츠 선수들의 행복감이구나!’하는 느낌이 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초긍정 마인드는 우상혁의 표정과 행동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이는 주위 사람들에게 해피 바이러스로 전파된다. 한 네티즌은 ‘비인기종목인 높이뛰기에 도전한 우상혁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중계를 봤는데 내가 도리어 응원을 받았다. 우리 아이들도 이런 긍정 마인드로 살면 좋겠다’는 글을 남겼다.

#김도균 코치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김도균 코치와 함께한 우상혁.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김도균 코치와 함께한 우상혁.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우상혁이 “나를 수렁에서 건져주시고, 오늘의 나를 만들어 주신 분”이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김도균 코치다.

김 코치는 높이뛰기 출신이 아니다. 높이뛰기의 사촌 격인 장대높이뛰기 국가대표였다. 스스로 특출한 선수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아시아선수권 2위가 최고 성적이다. 한국체대를 졸업하고 상무를 거쳐 자비로 미국·호주 등으로 공부를 하러 다녔다.

우상혁을 처음 만난 건 2018년 겨울. 부상 후유증으로 슬럼프에 빠진 걸 보며 “너 정도 재능 가진 선수 흔치 않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움츠리고 있는 상황이다”며 기를 살려주려 애썼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의 배려로 지난해부터 진민섭(장대높이뛰기)과 우상혁이 김 코치의 전담 지도를 받게 됐다. 진민섭도 바늘구멍을 뚫고 도쿄 올림픽에 진출했지만 부상으로 결선에 오르지는 못했다.

#멘탈 코칭

높이뛰기는 본인의 (달성해야 할) 기록을 보면서 뛰는 종목이라는 특성이 있다. 다른 기록 경기는 뛰고 나서야 본인의 기록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높이뛰기는 멘탈이 더욱 중요하다.

높이뛰기 선수는 하루에 몇 번 바를 넘을까. 보통 주 2~3일, 한 번 훈련에 15~20회 정도 바를 향해 몸을 날린다. 그런데 우상혁은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바를 넘는 훈련을 최소화했다. 몸 상태가 아주 좋거나, 시합과 시합 사이에 공백이 길다 싶을 때만 바를 넘는 훈련을 했다.

대신 바를 넘는 데 필요한 근력과 스피드를 키우는 데 중점을 뒀다. 우상혁은 발을 구르면서 도약할 때의 동작이 월등히 좋은데 그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김 코치는 분석했다. 선수는 그걸 알고 있어도 바꾸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비중이 낮은 대회에는 선수가 원하는 대로 뛰게 했다. 당연히 기록이 좋지 않았다. “그러면 이번에는 선생님이 하자는 대로 해 보자”는 식으로 김 코치는 우상혁과 ‘밀당’을 했다. 선수가 자존심 상하거나 피로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금씩 조금씩 스며드는 전략이 김 코치의 ‘멘탈 코칭’이었다.

실력이나 기록은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라듯 미세하게 쌓여가는 것이다. 우상혁은 ‘더디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으로 그 지루한 시간을 잘 이겨냈고 합당한 보상을 받았다.

#모델의 꿈

우상혁은 격리 기간에 배달 음식을 원 없이 시켜 먹었다고 했다. 치킨이나 피자 등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음식들. “먹는 게 하나의 행복이고 유튜브 먹방을 보면서 잠들 때도 많았다”던 우상혁은 “요즘은 1일 1치킨이다. 고생한 자신에 대한 포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먹고 싶은 건 다 먹되 조절을 한다. 습관이 배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우상혁은 옷 잘 입는 ‘패셔니스타’이기도 하다. 1m88㎝, 76㎏에 군살 하나 없는 조각 같은 몸매는 톱 모델이 부럽지 않다. 본인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내년 9월에 전역하면 모델 일도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방송·연예계와 상업광고 쪽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우상혁을 잘 아는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 가서 멈춰야 할 지를 잘 아는 젊은이다.

#2024 파리 올림픽

우상혁의 눈은 3년 뒤인 2024년 파리 올림픽을 향하고 있다. 그는 도쿄 올림픽 경기가 끝난 뒤 “나는 젊다. 내가 이번에 2m35㎝를 넘는 바람에 많은 선수들이 겁을 내서 은퇴할 거다. 파리에서는 금메달이 목표다”고 당차게 말했다.

우상혁은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마법’을 부릴 줄 안다. 다른 선수에게 “넌 올림픽 파이널 갈 수 있어. 한국기록 깰 수 있어”라고 말하면 ‘그냥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지. 이 기록으로 어떻게…’라며 속으로 웃어 넘기는 선수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상혁은 그런 얘기를 들으면 그에 대한 구체적인 꿈을 꾼다. 그리고 가능하지 않은 부분을 노력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도쿄에서 깻잎 한 장 차이로 넘지 못한 2m39㎝는 그에게 이미 꿈을 넘어 현실이 되었다.

황선우·여자배구도 4등, 금메달보다 더 뜨거운 감동

황선우

황선우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에서 4등은 ‘꼴찌나 마찬가지’였다. ‘메달권 밖’ ‘순위권 밖’이란 뜻이다. “잘 했어. 다음엔 꼭 메달 따자”라는 영혼 없는 격려만 남는다. 연금도, 병역 혜택도 없다.

이젠 세상이 바뀌었다. 때로 4등이 1등보다 더 뜨거운 감동을 주고 더 큰 사랑을 받는다. ‘투혼의 끝판왕’ 여자배구, ‘제2의 박태환’으로 떠오른 수영의 황선우(사진)도 4등이었다. 4등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응축해 다음을 준비하는 에너지원이 된다. 잘못된 관행과 시스템을 일거에 바꿔버리는 4등도 있다.

2012 런던 올림픽 펜싱 여자 에페 준결승에서 신아람은 종료 1초를 남기고 세 차례나 상대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계측 시간이 흐르지 않은 걸 잡아내지 못한 심판 때문에 결승행이 좌절됐다. 피스트를 떠나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린 신아람으로 인해 펜싱 국제대회 계측이 초 단위에서 100분의 1초 단위로 바뀌었다.

우상혁·황선우·여자배구 등 ‘금메달급 4등’을 보면서 “메달을 딴 선수에게만 주는 기존의 올림픽 연금·병역혜택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종목별 올림픽 참가팀 숫자와 선수 수준, 국내 저변과 운동 환경 등을 고려해야 하고, 육상·수영 등 개인 기록종목은 4위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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