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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통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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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주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야간 통금(통행금지)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종을 28번 치는 인정(人定)으로 통금을 시작했고, 33번 종을 치는 파루(罷漏)로 해제를 알렸다. 태종 때는 초경 3점(오후 8시)부터 오경 3점(오전 4시 30분)까지가 통금 시간이었다. 그러다 세조 이후 이경(오후 9시)부터 오경(오전 3시)으로 완화되었다고 전해진다. 『태종실록』에는 대사헌 이원(1368~1429)이 통금 시간을 어겨 파직됐다는 기록도 있다. 대사헌은 오늘날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고위직(종2품)이다.

해방 이후인 1945년 9월 미 군정도 치안을 이유로 야간 통금을 시행했다. 이것이 1982년 1월 5일 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폐지될 때까지 36년 넘게 이어졌다. 당시 오후 10시엔 어김없이 라디오에서 청소년 귀가를 독려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후 11시면 귀가하려는 사람으로 버스 정류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자정에는 사이렌 소리와 방범대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통금의 흔적은 택시 요금할증 시간(자정~오전 4시)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야간 통금이 다시 소환된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다. 4차 유행으로 12일부터 거리두기 4단계가 실시됐다. 오후 6시 이후 저녁 식사가 2인 이하로 제한된다. 둘이서 만나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웬만하면 일찍 귀가하라는 뜻이다. 이러다보니 거리두기 4단계는 사실상의 야간 통금으로 여겨지고 있다. 며칠 전까지 붐비던 밤거리가 한산해진 풍경이 야간 통금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밤의 자유가 사라진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백신 확보와 방역 완화 문제를 두고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청와대가 임명한 기모란 방역기획관과 상생방역을 취임 일성으로 강조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책임론도 불거지고 있다. 고개를 숙인 사람은 딱 한 명이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13일 국회 보건복지위에서 “방역완화 메시지가 4차 유행에 영향을 줬다. 신중히 소통하겠다”고 했다.

잘잘못은 면밀히 따져야 한다. 단, 향후 2주간은 방역에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조금만 참아달라’는 말에 꾹 참아가며 야간 통금을 실천 중인 국민들, 개미 한 마리 보기 어려운 밤거리를 허탈한 눈으로 바라보는 자영업자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