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처절한 몰골, 유족 비명…의사로 무기력했던 그날 사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75)

알람이 뜨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 없었다. 응급실 밖에 나가 서성였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꿀꺽. 신경이 곤두섰다. 이윽고 구급차가 매끄럽게 입구를 돌아 응급실로 들어섰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급한 환자가 타고 있으면 운전에도 조바심이 드러나는 법. 구급차 주행이 물 흐르듯 부드러운 게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시끄러워야 할 사이렌 소리도 꺼져 있었다. 이송 대원의 발걸음 또한 굼뜨고 무거웠다. 대신 석양이 만든 긴 그림자가 얼굴 가득 드리워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죽음을.

광주 건물 붕괴 사고로 다수 사상자가 예상된다는 소식이 핫라인을 타고 흘렀다. 반사적으로 자리를 뛰쳐나갔다. 잠깐의 해프닝으로 출동이 종결된 사례가 있었지만 그 기대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사진 unsplash]

광주 건물 붕괴 사고로 다수 사상자가 예상된다는 소식이 핫라인을 타고 흘렀다. 반사적으로 자리를 뛰쳐나갔다. 잠깐의 해프닝으로 출동이 종결된 사례가 있었지만 그 기대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사진 unsplash]

‘나른한’이라는 상투적 표현이 어울리는 오후였다. 점심을 마치고 컴퓨터 작업 중. 모니터엔 각종 문서가 가득 떠 있었다.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지루하면서도 평온한 일상이었다. 나는 졸음을 쫓기 위해 기지개를 쭉 켰다. 때마침 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평범한 오후의 전야는 그렇게 끝이 났다.

건물이 무너졌다. 누군가 잔해에 파묻혔다. 다수 사상자가 예상된다는 소식이 핫라인을 타고 흘렀다. 반사적으로 자리를 뛰쳐나갔다. 채 10분도 걸리지 않아 응급실에 재난팀이 꾸려졌다. 현장을 향해 떠나는 동료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별일 아닐 거야.” 그도 그리고 나도 설마를 되뇌었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지지난번도 그랬다. 십중팔구 빈손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깐의 해프닝으로 출동이 종결된 사례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기대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번은 달랐다.

“전남대병원 중증 환자 2명 수용 가능하답니다.”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다. 거점병원에서 고작 2명 수용이라니. 이래선 사상자를 구조해도 막상 이송할 병원이 없을 터. 현장 구조대의 당혹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 시각. 우리도 어안이 벙벙했다. “왜 우리가 2명밖에 수용 못 한다는 거지?” 원내의 모든 응급의학과 의사가 응급실에 모였다. 병원 집행부 도움을 받아 중증구역도 깨끗이 소개해 둔 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고작 2명이라니? 우리는 수화기 너머에 호기롭게 소리쳤다. 숫자 개의치 말고 이송해 오라고. 중환자실이 없으면 응급실에서라도 볼 테니 얼마든지 데려오라고.

폭풍이 일었다. 5명이나 되는 중증외상 환자가 쏟아져 들었다. 환자의 크고 작은 신음이 한 데 엉켜 잠시 소란이 일었다. 우리는 빠르게 손을 놀렸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터라 혼란은 길지 않았다. 환자 수보다 의사 수가 두 배 넘게 많았다. 그 때문에 진료가 착착 진행되었다. 응급실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손상이 심한 환자도 일단 위기를 넘겼다. 이만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 처치를 마무리하고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주위에서 사고 영상을 보여주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게 끝이 아니겠구나! 지금부터 구조되어 오는 환자는 상태가 훨씬 심각하겠네!’

인간이 만든 재난 앞에 인간인 의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력했다. 분노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평범했던 하루가 그렇게 처절하게 끝나고 있었다. [사진 unsplash]

인간이 만든 재난 앞에 인간인 의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력했다. 분노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평범했던 하루가 그렇게 처절하게 끝나고 있었다. [사진 unsplash]

잠시 소강상태를 갖는 사이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구조대가 버스 내부로 진입을 시도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긴장의 끈을 다시 조였다. 아니나 다를까? 추가 이송 소식이 들려왔다. 진짜는 이제부터다. ‘과연 몇이나 더 살릴 수 있을까? 오늘 밤은 길어지겠네.’ 119가 도착했다. 이송 대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급차에 올라 환자 상태를 확인했다. 처참한 몰골에서 직접 보지 못한 현장의 참혹함이 느껴졌다. 나중에 신원 확인을 위해 얼굴을 떠들어 보게 될 가족이 벌써 걱정될 정도였다. 나는 말 없이 흰 천을 머리 위로 덮어주었다.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숨만 붙어 있었어도 무언가 해보련만. 잠깐 터울을 두고 구급차가 둘 셋 계속 응급실로 들어섰다. 이제는 환자 얼굴을 덮고 있는 천을 떠들어 보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아무래도 살릴 수 있는 환자가 더는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구조는 계속되었지만, 구급차는 이제 환자가 아닌 망자를 싣고 달리고 있었다. 나는 환자를 응급실이 아닌 장례식장으로 인도했다. 인간이 만든 재난 앞에 인간인 의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력했다. 분노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유족들이 도착한 모양이다. 평범했던 하루가 처절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모두에게서.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