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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암 환자와 싸운 전공의…친절은 진료와 제로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72)

한 암 환자가 의사의 싸늘함에 서운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가슴이 뜨끔했다. 나 또한 많은 환자의 마지막을 함께했으니까. 죽음을 고지하던 내 모습도 늘 싸늘했을 테지.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심장에 못을 박았을 것이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는 게 의사의 인생이라 생각하니 착잡하다. 더구나 더 큰 문제는, 나는 여전히 답을 모른다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말이다.

“진료만 잘해주면 됐지. 저희가 친절까지 해야 하나요?”

환자와 싸운 전공의가 억울하다며 핏대를 세운다. 의무가 아닌 것을 강요해 싸움이 벌어졌으니 제 탓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이다. 전공의를 힐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누가 뭐래도 병원에서 우선순위는 명백하니까. 친절이 진료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실력 없고 친절한 의사보다 불친절하더라도 실력 있는 의사가 좋은 의사다. 때로 안목없는 대중은 전자에 환호하지만, 근본적으로 의사에게 요구되는 첫째 덕목은 누가 뭐래도 실력이다. 그러니 친절이 아니라 진료에만 신경 썼다는 태도를 어찌 탓하겠는가?

한 생명의 종말을 선언한 후 ‘눈물 한 방울 없이’ 라면을 끓여 먹는 게 능력이라 생각했다. 한 시간에 서너 명씩 줄줄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음 환자를 보는 게 실력이라 생각했다. [사진 pixabay]

한 생명의 종말을 선언한 후 ‘눈물 한 방울 없이’ 라면을 끓여 먹는 게 능력이라 생각했다. 한 시간에 서너 명씩 줄줄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음 환자를 보는 게 실력이라 생각했다. [사진 pixabay]

그렇다고 전공의 이야기에 마음이 편했던 것만도 아니다. 친절을 진료와 제로섬 관계로 인식하는 게 답답했다. 의사의 역할을 너무 협소하게 보고 있었다. 우리가 다루는 건 질병이 아니라 인간이다. 똑같은 약물을 투여해도 반응이 천양지차며, 살릴 수 있다고 자신하는 환자가 죽고 죽을 게 틀림없는 환자가 살기도 하는, 그런 불확실성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래서 의사와 환자 관계는 치료 순응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아니다. 그런 거창한 이유를 들 필요도 없겠다. 의료도 진료도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사회적 행위라면, 굳이 친절까지 해야 하냐는 질문이 나올 수는 없을 테니까.

우리는 왜 친절해야 하는가? 모든 비극은 이 질문에 대답을 못 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람은 당연히 친절해야 한다"는 공허한 대답뿐. ‘대체 내가 왜 친절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를 요구하면 대부분 말문이 막힌다. 다들 친절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고민 없이 살아간다. 그래서 환자는 병원에 오면 당연하다는 듯 친절을 요구하고, 반대로 의사는 ‘대체 내가 왜?’라는 의문을 머릿속에 달고 산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 또한 전공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응급의학과 의사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근무한다. 오랜 시간 실력을 갈고 닦았지만, 인성은 그만큼 기르지 못했다. 죽음은 늘 내 곁에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환자들에게 고지해 왔지만, 환자의 마음은 헤아려 본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누구도 나에게 환자의 마음을 토닥이는 방법을 일러주지 않았다. 이십 년 넘게 내가 배운 거라곤 환자의 몸뚱이를 치료하고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내 업무를 환자의 몸을 치료하는 거로 한정 지어왔고, 마음을 토닥이는 일은 가족이나 종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의사에게 기대하는 건 최고의 실력이지, 자상한 마음은 아닐 거라고 믿어왔다. 의사는 환자의 몸만 열심히 들여다보면,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 손이 환자를 보살필 거로 생각했다. 그러니 결국 나는 인술을 지니지 못한 그저 사람 몸뚱이나 고치는 싸늘한 기계에 불과하다.

나는 친절을 논할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후배는 똑같은 길 걷지 않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환자와 보호자가 너그럽게 이해해주길 바란다면 그또한 욕심일까. 병원에 조금 더 온기가 있으면 좋겠다. [사진 pixabay]

나는 친절을 논할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후배는 똑같은 길 걷지 않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환자와 보호자가 너그럽게 이해해주길 바란다면 그또한 욕심일까. 병원에 조금 더 온기가 있으면 좋겠다. [사진 pixabay]

세상에는 친절한 의사도 많다. 친절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의사도 있다. 친절이 무기이자 실력인 병원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그러한 친절은 대부분 돈이 되므로 가능하다. 반대로 내가 일하는 장소는 수익이 나지 않는 곳이며, 나는 수익으로 평가받는 의사가 아니다. 오히려 환자가 줄면 육신이 편해지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중증응급질환은 수익이 낮아 시중 병원에서 기피되다 보니, 환자는 너나없이 전부 우리 앞에 몰려든다. 내 손이 두 개뿐인 게 안타까울 정도로.

그래서 항상 마음을 죽이려고 노력해왔다. 한 생명의 종말을 선언한 후, 돌아서면 ‘눈물 한 방울 없이’ 라면을 끓여 먹는 게 능력이라 생각했다. 한 시간에 서너 명씩 줄줄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음 또 그다음 환자를 쉬지 않고 보는 게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죽음 하나에 사로잡혀 낙심하는 후배에게, 우리 일은 그런 게 아니라고, 그렇게는 이 일 오래 하지 못한다며 감정을 묻어두라고 충고해 왔던 게 바로 나다.

그러니 나는 친절을 논할 자격이 없다. 인제 와서 친절을 입에 담는 건 어떻게 봐도 꼰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잘 못 걸어온, 후회해 마지않는 인생의 길을 후배가 똑같이 걷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건 욕심일까?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이 조금은 더 우리를 너그럽게 이해해주길 바란다면 그 또한 욕심일까? 앞으로는 병원에 온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후배는 나보다 나을 테니.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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