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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전 남노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43년 봄에는 기차로 함경남도 삼방석왕사 안변을 거쳐 간성으로 가 금강산과 설악산의중간에 있는 건봉사를 찾아들어 갔다. 경찰이 내 뒤를 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건봉사에는 내가 동경에서 학비를 도와준 곽서정이 절 법무를 맡고 있었다.
그 절에서 몇 달 있으면서 풋사과를 따먹은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절에는 몇 해 숨어있어도 아무도 모르겠으나 속세가 궁금해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유격 근거지를 서울이북에는 건봉산, 서울근처에는 용문산, 그리고 서울 이남에는 지리산을 택하기로 마음먹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오니 이우적(일본유학생출신 구ML파 공산당원)이 형무소에서 출옥한다고 했다. 내가 동경유학 시절 방학 때 진주 집에 가면 어머니한테 늘 와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이 할머니가 이우적의 어머니다. 아들 때문에 늘 애태우고있다』고 하시곤 했다. 이우적은 나보다 열 네 살이나 위였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26년11월 재 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위원이 되었고 28년2월에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및 공청의 기관지 대중신문 및 현 단계의 편집위원을 겸했으며 두 달 후에는 일본총국의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에는 대구에서 권대형·이상조 (임화의 처남)등과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했다가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하자 또다시 인정식·이재유(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그룹을 조직한 행동파공산주의자)와 접선하고 체포되어 이제 출옥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장인과 함께 이우적을 서울 성북동으로 찾아갔다. 조그마한 사람이 명태와 같이 말라 눈만 빛났다.
이우적의 어머니가 나를 소개하며 『이 양반 어머니덕택으로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이 양반 형님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에 가 있고 이 양반도 대학을 졸업해 취직도 하지 않고 독립운동 한다고 조선팔도를 돌아다닌단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우적은 그 빼빼 마른 찬 손으로 『박동무!』하고 내 손을 꽉 쥐는 것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만난 이우적이 뒤에 나의 운명을 결정할 줄은 그때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얼마후 장인 정재화는 자기 질녀와 이우적을 결혼시켰다. 나와 이우적은 동지가 된 동시에 동서가 되었다. 그는 결혼 후 진주에서 살게 되었다. 내가 진주에 갈 때마다 그를 찾아가 시국과 독립에 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는 학벌은 없어도 굉장히 재주가 있어 마르크스나 레닌의 말을 줄줄 외고 있었다.
해방 후 이우적·조두원 (2차 고려공산당청년회원) 정태식 등 세 사람이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이론가라 하여 그들을 공산당의 삼재라 했다. 해방전의 조선삼재는 최남선·홍명희·이광수라 칭했다.
나는 하태·강태열·정봉식·이우낙·김찬기-형기 형제(민족지도자이며 유학자인 김창숙의아들), 그리고 이우적과 우선 여덟 사람으로 지하조직의 핵심을 형성하려고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강태열이 함안 광산에 취직했기 때문에 거기서 노동자 교양과 다이너마이트를 조금씩 훔쳐 내오도록 부탁하고 44년 봄에 나는 평안남도 개천탄광에 갔다. 그러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낯선 사람에 대한 회사측의 보안태세와 경찰의 경계의 눈이 엄격해 광원들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태평양전쟁은 처음 공세를 취하던 일본이 이제는 수세로 몰려 전선에서 계속 후퇴하고 있었다.
미 공군의 공습도 일본 본토 뿐 아니라 조선하늘에도 B29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시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운동은 완전히 궤멸되고 있었다. 민족주의자는 거의 다 일제에 굴복 하든가 사랑방에 들어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절을 굽히지 않고 있는 민족주의자는 김창숙과 홍명희 두 사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두 노인은 수절은 하고 있다해도 실제로 아무 투쟁력은 없었다.
김창숙은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있다. 전투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다 감옥에 갇혀있어 언제 떼죽음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홍명희는 서울근교 창동 집에 드러누워 꾀병을 앓고있고 허헌은 변호사 자격도 정지 당해 황해도 신천 처가에 가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선배라고 어디 가서 의논할 데가 없었다. 그 외 사람들은 정도의 차는 있어도 어느 정도일본에 순종하고 있는 것 같아 찾아가기도 싫었다.
나는 생각 끝에 진주로 이우적을 찾아갔다. 시국이야기를 하다가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내가 믿을만한 우수한 인재를 7∼8명 구해놓았으니 조직적으로 지도해줄 수 없는가』고 제의했다.
그러자 그는 『일본이 패색은 확연하나 1, 2년 내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니 조금 더 정세를 관망하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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