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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다…‘슈뢰딩거의 고양이’같은 文 방일[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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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도쿄 올림픽과 한ㆍ일 정상회담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고양이 중 한 마리를 꼽자면 ‘슈뢰딩거의 고양이’ 아닐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1935년 물리학자 에어빈 슈뢰딩거가 고안한 사고 실험이다. 무쇠 상자 안에 고양이 한 마리와 방사능원, 독이 들어있는 병, 그 위에 망치를 설치하는데 이 망치는 방사선을 측정할 수 있는 가이어 계수관과 연결돼 있다.
가이거 계수관에 방사선이 감지되면 망치가 움직여 독병을 깨고, 고양이는 사망한다.

이론물리학자 에어빈 슈뢰딩거.

이론물리학자 에어빈 슈뢰딩거.

하지만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까지는 결과를 알 수 없다. 즉 그사이 고양이는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존재가 된다.

양자역학 이론의 애매모호함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상존하는 것과 같은 모순된 상황이나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상황 등에 대한 비유로도 쓰인다.

8일 도쿄 시민들이 도쿄 올림픽 홍보물로 장식된 도쿄 거리를 걷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8일 도쿄 시민들이 도쿄 올림픽 홍보물로 장식된 도쿄 거리를 걷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금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한 문재인 대통령의 방일을 둘러싼 상황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떠올리게 한다.

올림픽 같은 글로벌 빅 이벤트는 고위급 외교의 장이 서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 기회에 정상 방문을 두고 이처럼 잡음이 이는 게 오히려 쉽지 않은 일이다.  

참석이 여의치 않아도 공식적으로는 “양 정상의 일정 등을 고려해 협의 중”이라는 식으로 점잖게 둘러대는 게 정상인데, 개막일이 채 보름도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서로 누가 먼저 간다고 했는지, 뭘 해줘야 갈 건지 등을 두고 시끄럽다.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연합뉴스

한국에서 “(도쿄 올림픽에 참석한다면)정상회담이 열렸으면 좋겠고, 그 결과 갈등들이 풀리는 성과도 있으면 좋겠다”(7일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고 메시지를 내고, 곧바로 일본 언론에서 “일본 정부가 문 대통령 방일 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와 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8일 요미우리신문)고 하더니, 스가 총리는 또 직후에 “문 대통령 참석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이래서야 고양이는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는 것과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고양이가 이미 죽었다면, 향후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 한ㆍ일 정상회담 카드 역시 죽은 것으로 봐야 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큰 경사를 축하하는 계기로조차 마주 앉을 수 없다면 다시 동력을 찾기는 힘들다. 다자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나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때마다 이런 신경전이 반복될 게 뻔하다.

이는 현 정부가 최악의 한ㆍ일 관계라는 부채를 그대로 차기 정부에 물려주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아셈볼룸에서 열린 대한민국 소재·부품·장비산업 성과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아셈볼룸에서 열린 대한민국 소재·부품·장비산업 성과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특히 일본의 수출 규제 보복에 대한 대응으로 외교적 옵션을 제외한 게 문 대통령 본인이었다. 박수현 수석은 지난 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 결정 직후)청와대와 정부 의견은 ‘외교적 방법에 의한 해결’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메시지 초안을 본 문 대통령 반응은 ‘침묵’이었고, 이는 ‘대단한 분노’를 의미했다”고 적었다.

문 대통령이 “나는 지금이 소부장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승부처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이런 메시지를 건의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국민 감정과 일본 조치의 부당성 등을 고려한 결정이었지만, 최악의 한ㆍ일 관계라는 결과 역시 문 정부의 외교 성적표에 깊게 각인될 수밖에 없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8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8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고양이가 살아 있다고 해도 한국에 대한 일본의 불신이 문제다.

문 대통령의 방일에 대한 일본 쪽 분위기는 두 줄로 요약된다. “온다면 환영하겠다. 하지만 특별대우는 기대하지 마라.”

주최국으로서 온다는 손님을 잘 대접이야 하겠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말라는 식이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 등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이 의미 있는 제안을 내놓지 않는 이상 정상 간 회동이 이뤄져도 한ㆍ일 관계 개선 등은 힘들다는 뜻이다.

한국은 현실적 여건 내에서 가능한 제안을 여러 차례 했는데, 일본이 고려조차 하지 않고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이 내놓은 제안은 애초에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을 그은 안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계속 같은 취지의 제안을 하니,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정말로 문제를 풀려는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2020 제32회 도쿄하계올림픽대회 대한민국 선수단 결단식’에서 선수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2020 제32회 도쿄하계올림픽대회 대한민국 선수단 결단식’에서 선수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아직 고양이는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고, 한ㆍ일 관계를 걱정하는 이들은 상자를 열었을 때 고양이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 다만 살아 있더라도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고 생각하는 고양이는 아닐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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