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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마리아 칼라스' 정은혜가 그려낸 "들리는 지옥"

중앙일보

입력

'지옥의 얼굴들'에 출연한 판소리꾼 정은혜. [사진 서울대 국악과 PAN-Drama Series]

'지옥의 얼굴들'에 출연한 판소리꾼 정은혜. [사진 서울대 국악과 PAN-Drama Series]

어둡던 화면에 웬 여성의 얼굴이 나타난다. 낮고 섬뜩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소리꾼 특유의 거칠고 힘있는 소리가 읊조린다. “지옥의 밑바닥. 인간은 왜 고향을, 그리고 친구를 배신할까.” 점점 커지는 그의 목소리 밑으로 피아노가 불안한 불협화음을 부수듯 연주한다.

영상의 주인공은 소리꾼 정은혜(37). 7세에 소리를 시작했고, 18세부터 15년에 걸쳐 판소리 다섯 바탕을 도합 여덟 번 완창했다. 정은혜의 소리에 매혹된 예술가는 많았다. 재즈 가수 나윤선, 현대 무용가 안은미, 음악가 장영규ㆍ정재일이 함께 작품을 만들어왔다. 국립창극단 단원이었고, 배우 황정민과 연극 ‘리처드 3세’에도 출연했다.

그가 이번에는 단테 ‘신곡’의 지옥 편으로 본인의 창작품을 내놨다. 영상 감독 김상만과 만든 20분짜리 영상 ‘지옥의 얼굴들’을 지난달 유튜브에 공개했고, 이달 12일 음반을 낸다.

'지옥의 얼굴들' 영상 중 정은혜. [사진 서울대 국악과 PAN-Drama Series]

'지옥의 얼굴들' 영상 중 정은혜. [사진 서울대 국악과 PAN-Drama Series]

“들리는 지옥을 만들고 싶었다.” 본지와 인터뷰에서 정은혜는 “시작한 장르는 판소리지만 소리의 본질에 항상 귀기울였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소리를 넣어본 것이 이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음악은 도무지 장르를 모르겠는 비정형이다. 첼로, 기타, 전자 기타, 베이스, 피아노, 북, 징이 나오고 정은혜의 노래는 판소리, 대중음악, 성악 발성을 넘나든다. ‘지옥의 얼굴들’ 유튜브 영상에 무용가 안은미는 “멈추지 않고 달리는 정은혜 소리는 우리의 척추뼈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다”고 댓글을 달았다.

 '지옥의 얼굴들' 영상 중 정은혜. [사진 서울대 국악과 PAN-Drama Series]

'지옥의 얼굴들' 영상 중 정은혜. [사진 서울대 국악과 PAN-Drama Series]

정은혜는 여기에서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인물 중 6명을 추려 혼자서 연기했다. 지옥을 체험하는 단테, 안내자 베르길리우스, 죽은 이들을 옮기는 뱃사공 카론, 불륜으로 지옥에 온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그리고 이교도다. 정은혜는 목소리와 표정을 자유롭게 변화시키며 6명을 소화해 낸다. 혼자서 여러 인물을 연기하는 일은 분명 판소리에서 왔다. “심청전에서도 5명 정도를 혼자 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땅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죄인, 검은 바람에 휩쓸리는 죄인의 목소리를 다 다르게 표현해야 했다.”

소리꾼 정은혜. [사진 정은혜 제공]

소리꾼 정은혜. [사진 정은혜 제공]

‘지옥의 얼굴들’은 많은 예술가의 뮤즈였던 정은혜의 첫 독립 창작품이다. 서울대 음대 국악과의 박사과정 수료를 위해 2015년 학교에서 한시간 공연한 창작 판소리였다.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 어느 날 오전 10시에 지도 교수님만 모시고 공연했다.” 지도 교수인 김승근 교수가 “혼자 듣기 아깝다”며 영상화를 추진했고 서울대 국악과 유튜브 계정에 올렸다. 김 교수는 “스토리에 흠뻑 빠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판소리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장르 실험의 최전선이었다”고 했다.

왜 ‘신곡’이었을까. “‘신곡’은 단테가 삶의 절망 한 가운데에 있을 때 썼다. 인간의 죄와 절망, 신의 섭리까지 고민하는 작품이다. 너무 아프게 다가오면서도 의지를 가지게 한다.” 12일 나오는 음반 버전에는 6인보다 더 많은 지옥의 군상이 들어갔다.

유난히 힘 있는 소리를 가진 정은혜는 “체력만 허락한다면 장르의 제한 없이 무엇이든 해보려 한다”고 했다. 그는 서양 성악으로 치면 높은 파(F), 솔(G)음까지 기백있게 낸다. 또한 중간과 낮은 음역에서 나오는 미묘한 쇳소리는 전설적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를 연상시킨다. 이런 소리이기에 그는 “1인극부터 프로그레시브 락까지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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