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인촌의 아들, 배우로서 편하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04 14:13

업데이트 2021.07.05 15:55

셰익스피어 '코리올라누스'에서 복합적인 영웅 코리올라누스로 출연하는 배우 남윤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셰익스피어 '코리올라누스'에서 복합적인 영웅 코리올라누스로 출연하는 배우 남윤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유명 배우인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유인촌 배우의 아들 남윤호(37)는 영화감독을 꿈꿨다. 정확히 스무살에 카메라를 들고 아버지가 만든 작은 무대에 함께 했다. 유인촌이 강원도 봉평에 2004년 개관한 달빛극장의 첫 공연 ‘리어왕’이었다. 기록용 영상을 남기려고 따라갔는데 엑스트라 한 명이 모자라 얼떨결에 무대에 올랐다. 역할은 ‘병사 4’.

4년만에 연극 복귀하는 배우 남윤호
영국 유학 후 '코리올라누스' 주연
"다른 삶에서 시작하기, 그게 바로 배우"

“어떤 불꽃 같은 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대가 이런 데였구나’라는.” 지난달 29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남윤호는 “조명이 비출 때 희열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 불꽃 때문에 미국 UCLA에 입학해 연기를 공부했다. 2012년에 원래 이름(유대식)을 성까지 바꾸고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로맨티스트 죽이기’로 시작해 ‘페리클레스’에서는 아버지와 한 무대에 섰고, ‘인코그니토’ ‘에쿠우스’‘보도지침’까지 출연하던 2017년 그는 한국을 떠났다.

경력이 막 자리를 잡던 참에 왜 그랬을까.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니 나만 느끼는 매너리즘이 생겼다. 내가 쓰는 동작, 다른 인물과 맞붙었을 때 나오는 감정 표현에서 ‘어, 이거 이전 공연에서 썼던 것과 비슷한데?’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한 단계 올라가는 느낌이 없었다.” 그는 영국 왕립연극학교(RADA) 석사과정 입학을 위해 오디션을 봤다. 당시 한국에서 연극 ‘보도지침’에 출연하며 토요일 공연 후 일요일 영국행 비행기를 타고, 월요일 오디션을 본 후 수요일 다시 한국에 도착해 목요일 무대에 다시 서는 스케줄이었다. 그는 앤서니 홉킨스, 비비안 리가 졸업한 이 학교의 시어터 랩(MA Theatre Lab) 첫 한국인 입학생이 됐다.

배우 남윤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배우 남윤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남윤호는 4년 만에 돌아와 이달 3일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시작한 연극 ‘코리올라누스’에서 코리올라누스를 연기한다. 셰익스피어는 이 마지막 비극의 주인공을 복합적 영웅으로 선택했다. 조국 로마를 구하지만 민중과 공감하지 못해 비난을 사고, 늘 승리하는 장군이지만 어머니 앞에서 나약하다. 셰익스피어의 탁월한 해석가인 양정웅 연출은 “삶을 바라보는 눈이 깊어지고 단단해졌다”며 남윤호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그가 단단해진 데에 팬데믹의 영향이 크다. “살면서 겪을 수 없는 사건을 계속해서 만났다”고 했다. 1년 과정의 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무대의 문을 두드리는 시간도 견뎠다. “드디어 지난해 2월에 ‘언베리드(Unburied)’라는 작품으로 런던 데뷔를 했는데 공연이 끝나자마자 셧다운에 들어갔다. 커뮤니티에 발을 들여놨다 싶은 순간 모든 극장이 문을 닫았다.”

완전한 고독이었다. “내 손으로 삶을 가꿔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남윤호는 한인 슈퍼에 취직해 주6일 60시간 이상 일했다. 계산, 물건 나르기, 정리를 했다. 극장 언저리에라도 있고 싶어 매표소 창구 직원을 하고 싶었는데 불가능해서 극장 청소를 했다. “유령 도시가 된 런던에서 빵이나 파스타 같은 주식은 몇 달째 구경도 못 하고, 슈퍼에서 남은 음식을 싸 와 먹었다.”

고립의 시간에 연기 훈련의 경험을 더한 결과를 이번 무대에서 내보인다. “학교에서는 유럽 전통의 연기론을 기본으로 돌아가서 배웠다. 이론, 방법론, 훈련을 연구하고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조금은 내가 쓸 수 있는 도구가 늘어났다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는 그에게 특히 아버지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작품이다. 유인촌은 ‘햄릿’으로 여러 차례 무대에 섰고, 2015년 부자가 함께했던 ‘페리클래스’도, 아버지의 극장에서 오른 첫 무대 ‘리어왕’도 셰익스피어였다. “연기 초반에는 넘어야 할 산이라든지, 뗄 수 없는 이름표 같은 존재가 아버지였다. 다른 존재로 인정받고 내 길을 가고 싶어서 이름을 바꿨다. 한없이 부정적일 수도 있는 감정이었는데, 이제 그런 시기는 다 지나갔다.”

그는 아버지의 존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갖게 됐다. “다른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라는 산 옆에 내 산을 쌓고 있다. 두 산이 얼마나 가까워지고 높아질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쌓아보는 중이다.” 그는 “아버지 때문에 편할 이유도, 부끄러울 필요도 없다. 원래 배우는 서로 다른 삶에서 시작하니까”라고 덧붙였다.

이번 무대는 3시간이 넘는 대작이다. 원작이 된 ‘플루타르크 영웅전’ 연구에서 시작해 각색에 공동 참여한 남윤호는 “500여년 전 작품이고, 그보다도 1500년 전 일인데 굳이 설명이 없어도 요즘 일어나는 일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관객들이 즐기고 재미있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우와 똑같이 경험하고 가는 일이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나는 무대 위에서 발가벗은 마음으로 모든 감정을 공유한다. 내 시간을 관객이 경험하는 순간이 황홀하다.”

이번 공연은 15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 내년 서울 마곡동으로 이전하기 전, LG아트센터의 마지막 기획 공연이다.

◇수정(7월 5일 오전 9시51분)=애초 기사에서 “앤서니 홉킨스, 비비안 리가 졸업한 이 학교의 첫 한국인 입학생이 됐다”라고 표현한 부분은 남윤호 배우가 영국 왕립연극학교(RADA) 전체가 아니라 석사과정 중 ‘시어터 랩(MA Theatre Lab)’의 첫 한국인 입학생이기에 기사 일부를 수정합니다. RADA의 학부와 연출ㆍ극작 분야 등 다른 석사과정에는 한국인 졸업생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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