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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등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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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해리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뜻과는 다르게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단어가 있다. 계모와 계부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쓰이는 한자 계(繼)는 이어나가다, 지속한다는 뜻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을 지속하는, 이어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단어에 편견이 씌워진 데에는 사회·문화적 영향이 크다. 동요 ‘신데렐라’의 가사만 봐도 그렇다. 신데렐라가 부모님을 잃고 계모에게 구박을 받았다는 구절은 수십 년 전부터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동화 ‘백설공주’에서도 공주는 계모를 피해 집을 나와 낯선 일곱 난쟁이와 함께 살아간다.

한국 고전동화 역시 마찬가지다. ‘콩쥐팥쥐’ ‘심청전’에도 구박하는 계모가 등장한다. ‘장화홍련전’에서는 딸을 살해하는 극악무도함까지 보여준다. 조선 시대 들어 계모와 전처 자식 간 갈등은 사회 문제가 되면서 ‘계모형 가정소설’이라는 독립된 문화 형태로 태어나기도 했다. 조혼으로 인한 질병과 잦은 요사(夭死)는 가부장 사회에서 계모의 빈번한 영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이원수, 『가정소설작품 세계의 시대적 변모』 41쪽)

계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현대사회에서 더 굳어졌다. 특히 미디어의 영향 때문이다. 계부의 학대나 성폭력은 영화나 뉴스 속의 단골 소재다. 실제로 2019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아동학대 가해자의 72.3%는 친부모인데도 말이다.

앞으로 주민등록표 등·초본에 이러한 계모·계부 표현이 사라진다. 행정안전부는 이같은 내용의 시행령 개정안을 5일 입법 예고했다. 당사자만 동의하면 부·모·자녀로 표기할 수 있다. 문제없이 잘살고 있는 재혼 가정이 의도치 않게 서류를 통해 커밍아웃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연말정산 같은 행정처리를 위해 등본을 제출하면서도 원치않게 가정사를 노출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편견 가득한 단어가 적힌 채로 말이다.

1968년부터 시작된 주민등록표 등·초본제는 시대에 맞지 않는 요소들이 많다. 동거인으로 표기했던 재혼가정 구성원에 대한 표현을 고친 건 2016년, 다문화 가정의 외국인 배우자를 표기할 수 있게 한 것도 2017년에서였다. 가정의 형태는 다양해지는데 낡은 관행과 행정이 바뀌는 속도는 늘 더디기만 하다. 더 다양한 가정을 포용하기 위한 변화의 발걸음은 한 걸음 더 앞서 나갈 순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