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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서울극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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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종로3가의 땅밑은 미로였다. 고민 끝에 그 지하철역에 내린 건 옳은 판단이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난생처음 혼자 서울 지하철을 탔던 예비 대학생 시절의 기자는 불행히도 환승 시스템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목적지인 충무로역까지의 교통편을 고민하던 끝에 결국 가장 마음 편한 방법, 도보를 선택했다.

간신히 제대로 된 방위를 잡아 출구를 벗어난 기자의 눈에 익숙한 이름의 건물이 들어왔다. 서울극장이었다. 지방 촌놈에게도 서울의 극장 이름들은 낯설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신문에는 영화 광고들이 즐비했다. 주말이 가까워질수록 지면 점유율이 상승했던 영화 광고들은 그 하단에 전국의 상영관 이름을 깨알같이 나열했다. 가장 좋은 자리에, 가장 큰 면적을 점유했던 서울의 개봉관 이름들은 자연스레 익숙한 존재가 됐다.

그 시절 종로에서 을지로를 거쳐 충무로까지 이어지는 지역은 서울의 ‘개봉관 벨트’였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역시 서울극장, 피카디리극장, 단성사가 자리한 종로3가였다.

단관이었던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은 전형적인 당시 극장의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매표소와 유리문으로 된 출입구가 1층에 있었고, 벽돌이나 시멘트로 단단하게 외피를 두른 2층에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대형 그림 간판이 걸려 있었다.

반면 오피스 빌딩을 연상시킬 정도로 세련된 외양의 서울극장은 어딘지 모르게 서구의 극장들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로써는 획기적이었던 3개 관 시스템으로 탈바꿈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무렵이라 ‘새것’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 시절 젊은이들은 서울극장 앞 작은 광장에서 만나고 헤어졌다. 그들은 극장 앞길에 한껏 펼쳐져 있던 오징어와 쥐포·땅콩이나 10분 뒤 시작하는 회차의 표를 흔들어대던 암표 상인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곤 했다. 그곳에서 ‘JFK’ ‘용서받지 못한 자’ ‘타이타닉’ ‘글래디에이터’ ‘신용문객잔’ ‘초록 물고기’ ‘페이스오프’를 보면서 기자도 그들과 함께 청춘을 흘려보냈다.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강북 상권의 쇠락이 겹치면서 2000년대 이후 고전을 면치 못했던 서울극장이 결국 문을 닫는다. 과거의 경쟁자들이 속속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그때 그 모습을 지켜온 서울극장이지만 더 이상 세월을 버텨내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렇게 또 한 시대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