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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청, 미 장관 집무실서 배수진 치고 배상금 반환 협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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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3〉

1908년 시카고를 방문한 우팅팡. [사진 김명호]

1908년 시카고를 방문한 우팅팡. [사진 김명호]

19세기 말, 중국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들끓었다. 시골 촌구석 어딜 가도 없는 곳이 없었다. 알코올 중독자나 상습 도박꾼 등 엉터리들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특정 분야 전문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관심 분야도 다양했다. 1872년 미국 기독교공리회가 파견한 스미스는 중국인의 성격과 소질에 관심이 많았다. 산둥(山東)성 서부 궁핍한 지역에 초·중 교육기관과 병원 설립하고 노동자와 농민만 상대했다.

중 파견 미 선교사 스미스도 지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서신 보내 #미, 마침내 1160만 달러 반환 통보 #량의 후임 중 1호 해외박사 우팅팡 #매년 중 학생 100명 미 유학 제안 #중, 칭화학당 만들어 유학생 모집

황하 범람해 1000만여 명 희생

첫 번째 주미공사 시절 미국 독립기념일 경축식에서 축사하는 우팅팡. 1901년 7월 4일, 필라델피아. [사진 김명호]

첫 번째 주미공사 시절 미국 독립기념일 경축식에서 축사하는 우팅팡. 1901년 7월 4일, 필라델피아. [사진 김명호]

1876년, 200년 만의 홍수로 황하가 범람했다. 아편 재배로 농지가 줄어들다 보니 비축한 식량이 바닥났다. 2년간 사망자가 1000만 명을 웃돌았다. 참극을 목도한 스미스는 어이가 없었다. 본국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늘과 인간이 연출한 재앙으로 사방에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다. 말로만 듣던 역자이식(易子以食), 자식을 서로 바꿔 삶아 먹는 비극이 빈번하다. 유럽 같으면 빵을 달라며 혁명이 일어나고도 남을 일이 2년간 계속돼도 관청 문전은 썰렁하고 지주의 창고도 멀쩡했다. 대형 민란이 일어날 줄 알았던 나는 이 나라 빈곤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감히 못 한다는 말 듣고 놀랐다. 수천 년간 고위공직자의 유사무공(有私無公)에 길들여진 중국 빈곤층의 목표는 단 하나,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뿐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교나 물질 지원이 아니다. 미국은 교육을 통한 정신개조로 중국을 도와야 한다.”

30여 년간 중국에서 온갖 체험한 스미스는 경자년 배상금으로 중국 청년들을 미국에서 교육 시키자는 주미공사 량청(梁誠·양성)의 구상에 공감했다.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중국 학생들의 미국유학과 교회학교 설립을 역설하는 서신을 보냈다. “중국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한 것 같아도 진짜 변화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조만간 시동이 걸리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 물질이 도덕을 압도하는 변화가 서구에 악영향을 끼칠까 우려된다. 중국인들에게 진정과 성실로 용기와 희망을 줄 적절한 시점이다. 노 대국의 거대한 변화를 영접할 준비와 방법을 심사숙고하기 바란다.”

산둥성 선교 시절의 스미스. [사진 김명호]

산둥성 선교 시절의 스미스. [사진 김명호]

루즈벨트는 스미스가 쓴 중국 관련 저서의 애독자였다. 친필답장을 보냈다. “그간 배상금을 어디에 쓸지 고심했다. 귀하의 제안에 공감한다.” 하버드와 예일 등 명문대학에도 중국 학생들의 미국유학을 위해 의원들 설득에 힘써달라고 당부했다. 대통령이 나서고 언론과 지식인들이 호응이 잇달아도 각료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량청은 초조했다. 베이징의 외교부에 우려를 전달했다. “미국 정부는 목청만 컸지 동작은 완만하다. 현 정부 요원들을 갈아치우지 않으면, 우리의 구상은 물거품이 된다. 대통령의 덕담을 결정으로 믿은 우리가 잘못이다. 시간 절약을 위해 직접 나서겠다.”

량청은 신발 끈을 조여 맸다. 내무장관 카필드와 공상부장관 스트라우스의 집무실에 진을 쳤다. 량의 극성은 효과가 있었다. 배상금 반환이 환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량은 본국 외교부에 후임자를 물색해 달라고 요청했다. 중국 외교부는 의화단사건 시절 주미공사를 역임했던 우팅팡(伍廷芳·오정방)을 량의 후임으로 정하고 미국 측에 통보했다. 소식을 들은 루즈벨트는 량을 백악관으로 불렀다. 관계 장관까지 배석한 자리에서 귀국 전까지 배상금 반환을 결정하겠다며 량을 안심시켰다. 1907년 6월 15일, 신임 국무장관이 청나라 정부에 1160만 달러를 반환하겠다고 통보했다.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량청은 진이 빠졌다. 모친이 있는 고향으로 낙향했다. 치료를 위해 홍콩으로 이주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 52세로 숨을 거뒀다. 우팅팡은 공사가 아닌 흠차대신 직함으로 미국에 부임했다. 우는 지금은 광저우에 편입된 팡춘(芳村)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물려받은 유산으로 영국유학 길에 올랐다. 런던에서 중등교육 마치고 런던대학 법학박사 학위 받은 중국의 1호 해외박사였다. 홍콩의 법률사무소에 재직 중 해외순방 떠나는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통상교섭대신을 겸하던 리는 외국과 교섭할 외교관 후보를 물색 중이었다.

리훙장은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웠다. 사람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우팅팡을 가까이 두고 이일 저일 시키며 5년간 관찰한 후 측근에게 우의 인물평을 했다. “생긴 것과 복장만 중국인이다. 뉴잉글랜드의 미국인 상대하기에 저만한 인재가 없다.” 성격이 급하다며 재고를 요청하는 측근의 권유도 묵살했다. “급한 것과 민첩한 것은 다르다.”

베이징에 미국유학예비학교 신설

1912년 위싱턴에 집결한 칭화학당 출신 유학생. [사진 김명호]

1912년 위싱턴에 집결한 칭화학당 출신 유학생. [사진 김명호]

19세기 말 주미공사를 역임했던 우팅팡은 미국 조야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유학생 파견규정 협의하며 중국에 필요한 인재양성방안을 관철시켰다. “초기 4년간 중국은 매년 100명의 유학생을 미국에 파견한다. 5년째부터는 반환금이 다할 때까지 한 해에 50명 유학생을 보낸다. 청나라 정부는 미국유학 예비학교를 베이징에 설립한다. 고전문학과 역사지식이 풍부한 학생들을 선발해 미국대학 강의 청취력이 가능할 정도의 영어교육을 시킨다. 유학생 중 80%는 농업, 기계공학, 광산, 물리, 화학, 철도공정, 금융 분야를, 나머지 20%는 법률과 정치학을 전공한다.”

청나라 정부는 황실정원칭화위안(淸華園)에 유미학무처(游美學務處)를 신설하고 학생을 모집했다. 정부시책과 미국유학 조건을 갖춘 응시가 거의 없었다. 응시자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학무처의 명칭을 칭화학당으로 바꿨다. “중국의 영수급 인재를 양성하는 실험학교”라며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다. 중국은 소문이 빠른 나라였다. 순식간에 전국에서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선발 과정은 엄격하고 혹독했다. 중간에 때려치우는 응시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지원자 630명 중 중국역사와 중·미관계에 새 장을 열 47명이 합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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